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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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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01. 01.
멸망은 다가오고, 너희는 찬연하다

28
1828
멸망할 세계
류 명, 신혜야, 유비연, 초해랑
이음, 에슈, 주민, 이엘
거대하던 몸집을 줄여 인간의 모습으로 바꿨다. 아이들이 올 시간이었다. 뾰족한 비늘은 금방 자취를 감추고 인간 같은 맨살이 보였다. 적당한 천을 걸치고는 맨발로 아이들을 마중 나갔다. 천문탑의 모습을 하는 나의 레어는 아이들이 올라오기에는 꽤 버겁겠구나. 그런데도 저 짧은 수명을 지니고 오르려고 하고 있네.
“도, 도착했어! 여기가 최상층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떠난 작디작은 토끼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방황하던 아이는 길을 찾는 듯했고, 인간의 황제가 되려는 아이는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왔다.
“늦었구나.”
예상대로라면, 진작에 도착했을 아이들이었다. 그 사이에 이 레어의 구조를 잊은 걸까. 내 생각보다 비연을 어리석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인연의 끈이 희미해져 잊혀진 것인지. 잠시 흥미를 가졌다 이내 잃었다. 전부 바스러질 것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늦지 않았습니다.” 해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진실로 그리 생각하니?” 이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이것이 정답인지, 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끝없이 자신들을 의심하는 와중에 눈빛이 뚜렷한 것은 명이 밖에 없었다. 수없이 자신을 의심하던 아이만이 스스로의 길에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그 짧은 사이에 자라는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대답은 한결같겠지. 하지만 다시 물으마.”
나는 잠시 멈추었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 보았다.
“실로,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나?”
🌟
별이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언제나 진실되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때로는 과거였고, 때로는 현재였으며, 때로는 미래였다. 이 별의 속삭임은 주로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인간들은 그것을 ‘예언’이라 부르며 떠받들었다. 그 예언을 내려주었다.
“이 세상은 멸망한다.”
불안, 기대, 두려움, 동경…. 여러 감정을 지니며 예언을 기다리던 인간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멸망은 너희들에게 가혹하게 찾아올 것이다. 불에도 타지 않는 벌레가 살을 좀 먹고, 메뚜기 떼가 작물을 전부 삼켜버리겠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병에 시체가 나뒹굴고, 그 시체를 통해 또 다른 병이 돌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의심암귀가 내려앉아 인두겁을 쓴 짐승이 제집인 마냥 활개를 칠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질수록 인간들의 얼굴은 한같이 새하얗게 되었다, 말이 끝나자 일제히 비명이 천지를 울렸다. 겨우 이 정도의 말에 사색이 되는 인간들은 참으로 나약하구나. 나는 해랑이 떠올렸다, 비연을 떠올렸다, 명을 떠올렸다. 그 아이들이 참으로 특이했다는 것을 방금에서야 새삼 깨달았다.
“만약 그런 고통이 두렵다면.”
구원을 바라는 인간들이 비명을 삼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직접, 너희의 명을 끝내주겠다.”
신처럼 모셔지는 수호룡이 선언했다. 너희들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조차 없다고.
“낮이 겨울처럼 짧아지고, 기나긴 밤에 붉게 물들고, 세상의 별도 달도 보이지 않게 되는 그날.”
나는 그날 인간들을 몇 번이나 지옥 불에 담갔던가. 허나, 그것이 진실일 뿐이었다.
내가 그 예언을 마치고 레어로 돌아가는 동안, 너희 셋이 나에게 달려왔다. 모두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해야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때 나의 종속이었던 아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질렀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대답은 원치 않은 듯했다. 몇 번 숨을 고르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소리쳤다.
“정말 그 수밖에 없나요?” 그것이 너희가 인간이 안온하게 죽을 유일한 방법이지.
“당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는 건가요?” 그 또한 운명이니.
“바스러져 가는 생명이 가엽지는 않으신가요?” 바스러지는 것조차 순리인 것을.
“그 잠깐의 손길을 내밀 수는 없던 건가요?” 무엇을 위해?
“아니, 아니, 아니! 당신은 애초에!” 아이야, 비연아, 너는 지금
“단 한마디의 상냥함조차 내비칠 수 없었던 건가요?” 인간들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니, 너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해랑이 비연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이성을 차리지 못하는 아이를 뒤로 보내었다. 그래, 왕관을 원하는 아이야. 말해보련.
“…… 만약 저희가, 그 고통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세계는 멸할지언정,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요.”
그 물음은 참으로 현명했고, 또한 어리석었다. 군림하는 자의 오만이자 비정이었다. 가장 아래에 깔려있을 자들은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잔혹하게 죽어갈 터인데. 허나 그 또한 인간이었고, 그 또한 해랑이었다.
“그 물음에 답을 하자면, 그러하겠지.”
“그렇다면,”
“허나, 난 너희를 믿지 않는다. 나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다.”
너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너에게 나는 해답을 내어주었다.
“그러니 증명해 보여라.”
“어떻게 증명할까요.”
“너희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명을, 나를 죽여서 해내거라.”
아이들을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해랑은 고개를 숙여 그 제안에 응했다.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당신 앞에서.”충격이라도 받은 듯 눈이 커진 비연을 데리고 해랑은 떠나갔다. 나는 남은 채로 나를 쳐다보는 명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무엇을 묻기 위해 아직 남아있니.”
“마지막으로 혜야님의 모습을 담으려 남아있습니다.”
“나를 죽이러 직접 오겠다면, 마지막은 아닐지도 모르지.”
“…네?”
나는 의아한 표정을 내보이며 너에게 말했다.
“너는 이 나라에서 괜찮은 능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아이란다. 그런 네가 나를 죽이려는 곳에서 빠지려고 하느냐?”
“… 제가 가진 힘은, 온전한 저의 것이 아니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라. 준 것은 준 것. 돌려받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다시 뵙게 되겠네요.”
나는 그날, 문득 너에게 하나를 물었었지.
“명아, 네가 지금 걸을 그 길은, 실로 옳다고 생각하는가?”
너는 분명 그 말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고 떠나갔었지. 나는 과거를 회상하던 것을 그만두고 나를 찾아온 너희들을 마주했다. 하나같이 깊고 작은 상처가 선명했다. 나는 다시금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아, 너희들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실로 옳다고 생각하는가?”
바람 소리만 들리는 최상층에서 명이만이 그 말에 대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후회도 할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약간의 짐이 내려앉았다. 남겨질 이 세상 속에서, 내려앉을 멸망 속에서도 너희들은 참으로 선명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