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Collapse

2021. 07. 10.

로고 2.png

Now

2023. 05. 29.

반쪽짜리 삶

15_윤씨쌍둥이_색상.png

15

윤씨쌍둥이

멸망한 세계

윤성하, 윤세하

주민, 렝슈

휴대폰이 울린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완전히 알람이 꺼질 때쯤 세하의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엄마는 세하의 어깨를 흔들며 아이를 세차게 깨웠다. 몇 번이고 잠투정하고서야 그녀는 어물쩍거리며 일어났다. 세수하고, 교복을 갈아입고, 겨우 시간을 낸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하고 등교. 매일같이 당연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등교를 하는 길에는 이어폰을 끼고 걸어간다. 검은색의 투박한 디자인의 물건은 아버지가 잘 못 사 온 물건이었다. 좀 더 색채가 풍부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과는 약간 달랐지만, 아버지가 사 온 것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들을 노래를 고르다가 문득 생소한 밴드에 눈길이 갔다. 이런 음원이 나한테 있었던가? 자주 깜빡하는 세하의 기억은 종종 이런 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런 것이 있었다. 미묘한 기시감. 실수로 남자아이의 옷을 사 오는 아버지나, 아무도 마시지 않는 쓰디쓴 커피를 구해온 어머니나, 나도 모르게 누굴 찾는 것처럼 드라마 채널을 찾아다니거나, 괜히 창고 방을 드나들거나…. 그런 이상한 시간이 가끔 있다. 물론 범인을 찾아야 하는 아버지가 옷을 잘 못 사 오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마시진 못하지만 향을 즐기는 것은 어머니도 좋아했다. 난 드라마보단 예능이 더 좋으니까 모르는 배우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말이야.

 

“세하야! 윤세하!”

“어? 어?! 안녕! 언제 왔어?”

“계속 불렀거든? 이어폰 때문에 못 들었나 보네. 아, 어제저녁의 그거 봤어?”

“봤어! 엄청 재밌더라!”

 

세하는 급하게 이어폰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괜한 기시감이다. 그리 결론을 내고 친구와 떠들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새로 생긴 와플 가게까지 넘어가고, 자연스레 주말 약속을 잡았다. 앗, 잠깐 수학쌤 숙제가 있었어?! 나 보여주라! 세하는 친구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

 

 

“으…, 으음. 뭐야?”

 

갑자기 새어오는 빛에 눈이 뜨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낡은 모포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방금 잠에서 깬 머리가 먹먹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빛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저보다 큰 남성이 천천히 문을 닫고 있었다.

 

“□□□□?”

“아, 응, 방금.”

 

남자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는 매고 있던 가방에서 포장된 빵과 생수병을 내밀었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거 구하러 다녀온 거야?”

“□□□□.”

“아아니, 불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같이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 □□□.”

“어 정말?! 미안….”

“□□. □□□ □□.”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빵을 입에 넣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제야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보다 훨씬 큰 키에 검은색 머리카락, 맹수같이 날카로운 금안.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일 텐데, 엄청 익숙한 사람 같았다.

 

“□□.”

“뭐, 뭐머, 보는 것도 안 돼?”

“□□□.”

“뭐가 닳아!”

 

금세 또 못된 말을 하는 남자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은 말을 이쁘게 한 적이 없어! … 어라? 만난 적이 있던가. 나는 눈을 끔벅이며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 입이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 너, 이상한 거 안 할 거지?”

“□□□ □□ □□□.”

“… 그냥 대답해. 이상한 짓 안 할 거지?”

“□□ □□□ □.”

“그냥 뭐든. 어차피 곧 군대가 오면 구출될 거니까. 나쁜 생각 하지 마.”

“….”

 

그때 무엇이라 대답했더라. 나는 왜 그걸 물었더라. 너는 도대체 누구였든 걸까.

 

너의 이름을 내뱉으려 할 때, 갑자기 귓가에 거대한 이명이 들렸다. 눈앞의 남자의 얼굴에는 먹칠을 한 것처럼 검게 물들고, 귀에는 주파수를 맞추는 듯 삐, 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잠깐, 아직, 답을 듣지 못했어.

 

[신경 쓰지 마. 다시 잠들어 윤세하.]

 

잠깐, 기다려 윤――!

 

 

 

💻

 

 

 

“세하! 너 또 자네. 언제쯤 내 시간에 안 잘래. 다른 수업에서도 이렇니?”

“어? 어? 그, 죄송합니다.”

“집에서 뭐 하길래 내가 너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죄송합니다!”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학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다시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세하는 머쓱하게 웃으며 교과서를 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노트에 작게 글을 썼다.

 

[무슨 꿈 꿨어? 잘 때 표정 엄청 다이내믹했어]

 

세하는 펜을 들어 그 밑에 답을 적었다.

 

[기억안나... (ㅜㅜ)]

 

그리고 다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필기하는 척 친구와 필담을 이어 나갔다.

 

[나 수학쌤한테 찍혔을까?]

[이미 저쌤은 너 출석번호까지 다 외움]

[ㅎ. 망했네]

 

 

 

📡

 

 

 

 

“이렇게 윤세하는 필담을 하다가, 다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걸린 후에, 교무실 이벤트 발생…. 시뮬레이션까지 제대로 돌아가네.”

 

창문 하나 없는 단칸방안에 남자가 하나 있다.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헤드셋을 벗고 의자에 기댄다. 여긴 삭막했다. 침대를 대신해 푹신한 의자에서 선잠을 잤다. 생명활동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몸이 된 덕분에 화장실은커녕 식사도 필요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은 단 하나였다. 이 작은 지하 벙커방에 홀로 존재하며 제 눈앞에 있는 세상을 관리하고 모니터링하는 것 뿐이었다.

 

우리들의 삶은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적어도 윤세하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진실이었다. 우리들의 세상은 이미 멸망했고, 생존자는 나 하나뿐이다. 냉정하게 말해, 생명 활동도 하지 않는 자신이 인간이라 불릴 자격이 있느냐 하면 대답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아직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인간으로 남아야지만 제 앞에 있는 모니터 속 세상을 인간답게 꾸려나갈 수 있었다.

 

“… 아, 커피나 마시고 싶다.”

 

이제 커피 냄새조차 잊은 주제 그리 중얼거렸다. 인류는 멸망했다. 몇몇 운이 좋은 사람들과 이 일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높으신 분과 과학자들 외에는 이미 죽음을 맞이했다. 과학자들은 이 세상을 버리고 본인들의 정신을 가상 세계로 보내는 연구를 이어왔고 기어코 성공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가상 세계를 바깥에서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식사도 잠도 공기도 필요 없는 일종의 초월적인 인간을 만드는 연구까지 해냈다는 점은 오히려 대단하기까지 했다.

 

“우리 가족들도 참 대단해.”

 

겨우 살아남아 다시 만났던 가족들의 표정을 그는 기억했다. 생존자 중 자신이 유일하게 초월자에 적합한 유전자라는 것을 알아버린 가족의 오열을 떠올렸다. 감정이 희미해질 것 같을 때는 그때를 떠올리곤 했다.

 

“그냥 완전히 잊어버리면 좋을 텐데.”

 

윤세하, 괜히 감을 좋아서. 억지로 약을 먹여 재운 채로 저쪽 세상으로 보낸 것이 문제였을까? 윤세하를 중심으로 가족들은 가끔 자신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건 거대한 버그였다. 그쪽 세상에서 자신은 태어난 적도 없는 존재니까. 윤세하는 단란한 부부 아래의 무남독녀의 사랑받는 외동딸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 자신을 떠올리려고 하는 걸까. 참으로 비참한 삶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