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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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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2. 26.

Happy Bad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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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Dried Midnight

멸망할 세계

갤러해드 셰넌 아그로베일, 잭 마틴 클라크

마왕, 개

-2023. 1. 1.

 

 새벽 2시, 자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튜브 쇼츠나 하릴없이 기계적으로 내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의 영상 중 하나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사후세계의 진실!]

[지금이라도 대비해두어야 한다. 2022 세계 멸망]

[90세 예언자가 경고한 소름끼치는 미래]

 

 위의 과정을 출근이 코 앞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어떻게든 뜬 눈으로 월요일에만 꾸역꾸역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별 다른 이유 없이도 주에 3-4회 정도 꾸준히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이 전부를 봤을 수도 있겠다.

 

 그 영상들은 대개 구체적이지만 적중률은 0에 수렴하는 음모론, 혹은 두루뭉술하고 지구는 돈다, 같은 진리에 가까운 말들을 뱉어가며 확률을 높여 끼워맞추는 식이었고 잭은 이 영상도 그들과 같으리라 믿었다.

 

[2023. 2. 21.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다.]

 

 수백억 마리의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대다수는 지구가 무한한 것처럼 살아간다지만 소수로나마 환경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신경쓸만한 영상에 비해서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어떤 염려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잭은 그 영상이 어떤 영화의 광고인 줄 알고 눌렀더란다. [이 채널을  추천하지 않음] [1월 1일 됐다고 사이비들이 창궐하냐?] [마블 타노스같은 소리 하고 있네]…하는 댓글 창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고,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후에는 가뿐히 잊어버렸다. 그의 망막에 맺혔던 수많은 영상들과 같이. 정초 새벽부터 이런 영상을 보게 된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재수가 없군.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2023. 2. 21.

 

그러나 잭은 다시 그 영상을 찾아야만 했다. 우측 상단에 표시되는 시간은 오후 3시 2분. 화요일이었지만 요일에 구애받지 않는 백수의 기상시간으로부터 30여 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기상 직후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는 건 뇌를 좀먹는다는 영상을 5개쯤 봤음에도 개선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이 누른 유뷰트의 홈이 평소와는 달랐다. 온갖 영양가 없는 영상들로 도배되어있어야 할 메인 화면에는 뉴스가 도배되어있었다. 속보, 단체 실종, 자세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아…. 이대로 인류 멸망하나? 눈을 반쯤 가리는 앞머리를 넘길 생각도 않고 뻑뻑한 눈을 깜빡이던 잭은  실로 오랜만에 자의로 BBC 뉴스를 찾아보았다. 기사에서는 전부 똑같은 영상을 언급하고 있었다.

 

 오늘 날짜가 며칠이더라. 그래. 21일…. 2023. 2. 21. 인류의, 까지만 쳐도 자동완성이 다 나왔다. 지금 보니 채널명이 마왕의 개다. 모시는 신이 마왕인 건가? 아니, 마왕을 신이라 해도 되나? 여전히 현실이 아닌 픽션을 대하는 듯한 태평한 의문과 함께 로딩된 영상은 2023년 1월 1일 처음 게시되었을 때와 같았다. 차이점은 단 두 가지. 5.1천 회에 불과하던 조회수가 몇억 뷰를 찍으며 인기 급상승 순위 #1에 오른 것. 그리고 수천만 개의 댓글.

 

[이 사람 찾아야하는 거 아님?] 좋아요 107만, 실로 경이로운 숫자였다.

[└지금 경찰도 마비상태라는데 어떻게 찾아요ㅠㅠ] 좋아요 4천

[와 미쳤다 ㄷㄷ진짜뭐하는 인간이냐] 좋아요 14만

 

 그중에는 잭이 찾는 댓글도 있었다.

 

[영상 요약.

1. 2023/2/21 세상에 인류의 절반이 사라짐>시차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꾸준히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음. 아니, 증발하고 있음. 심지어 보도하던 앵커도 사라짐. 기준은 없어보임. 안 밝혀진 걸지도. 진짜 타노스인가? (2/21 오후 2시 반 수정)

2. 2023/2/22 그 남은 인류 중 90%가 또 사라짐. > 총 인구의 5%만 남는다.

3. 2023/2/23 세상에 낮이 사라짐. > 밤만 남는다는 얘기인듯?

4. 2023/2/24 세상에 모든 화폐가 사라짐.

5. 2023/2/25 세상에 고통이 사라짐.

6. 2023/2/26 모든 인류가 별 속에 흩어짐.

이후 세계가 재창조 됨. “마왕”은 세계를 리셋 시키는 게 목표라고 함. 정확히 인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보관? 의 상태에 놓이는 거고, 나중에 청소?? 해서 다시 꺼내질 예정이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음. 자세한 사유는 불명. 혹시 틀린 얘기 있다면 답글로 알려주세요~!! + 싸우지마세요ㅠ 저희 다 죽게 생겼는데..ㅠ ]

좋아요 1.3천 답글

▼답글 500개

└ 낮이 사라지면 다 죽는 거 아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 맞습니다. 햇빛이 없다면 강, 바다, 식물 등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게 얼어붙게 됩니다. 실상 2/23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영상대로 된다면 말이지만요.

└ 아니 인류 5%남겨놓고 고통 사라지게 하면 뭐하자는건데;; 아 진짜 난 이대로 죽기 싫다고ㅠㅠ

└ 딸ㄱㅣTV 대박인데  ㄷㄷ 프로필 눌러봐~

└└ 스팸들은 지구 멸망하게 생겼는데도 광고하냐 ㅋㅋ 야 적당히 해라 돈이 사라진다잖냐

└ 거짓말이겟져?ㅜㅜ 저 너무 심장 뛰어요 제발누가거짓말이라해ㅜ주세요

└└ 괜찮을 거예요 심호흡 하세요

└└ 거짓말이겠음?ㅋㅋ 진짜 인류 절반이 이 영상 날짜에 맞춰서 사라졌는데ㅋㅋ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면 개꿀 아님?

└└└ 왜 이렇게 말을 못되게하시나요… 님은 고통받으면서 죽으실 것 같아요…

└ 겟이 아니라 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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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친절한 누군가가 요약해둔 댓글을 본 뒤에도 잭은 별생각이 없었다. 어제 몇 시에 잤더라. 아니, 오늘이지. 아침 8시? 7시간도 못 잤는데 좀 더 잘까. 잭은 외벽유리를 청소하지 않아 미세먼지가 다닥다닥 달라붙은 창문 밖을 내다볼 생각조차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의욕이 들지 않았다. 유튜브 쇼츠를 너무 많이 봐서 전두엽이 녹기라도 한 걸까? 세상의 멸망이 코 앞인데, 아니, 이미 실시간 라이브로 진행 중인데 어떠한 위기감도 들지 않았다.

 

 마지막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도덕성을 포기한 족속들은 치고 박고 싸우기 바빴다. 잭처럼 당장 하루 살고 말 것처럼 버텨온 이들이 아닌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합당한 보상을 원했다. 그러나 보상을 줄 만한 신적인 존재는 인류를 버렸고, 그들은 결국 쟁취하다 못해 약탈하기를 택했다. 사이렌 소리와 경적, 비명이 혼재했다.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려댔으나 없는 체했다. 곧 소음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잠은 깬 뒤였다.

 

 잭 역시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었다. 아주 어릴 때. 그리고 아저씨가 되어버린 근 몇 년간. 다만 어릴 때에는 먼 미래를 상정했고, 근래에는 당장 내일을 전제로 두었다. 난 글러 먹긴 했어도 크리스천이니까 죽으면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려나. 그러면 분명 지옥이겠지. 마왕의 개라는 채널조차 답을 주지 않을 것 같은 그 물음은 잭을 무력하게나마 살아가게 만들었다. 혹은 살아가게 했으나 동시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잭은 금번의 소동에도 놀라지 않았다. 늘 죽음을 각오했고 끝을 바라보았다. 잠이 들 때까지 인류의 반이 사라져도 건재한 영상들을 바라보는 일, 거기에 타인일 뿐인 사람들의 소란이 더해진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사후세계에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인생이라는 점도.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각은 오후 10시 30분이었다.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확인한 댓글에서는 사람들이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릴 꿈, 소망, 사랑 같은 것들을 적고 있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증오, 시기, 후회에 대한 댓글들이 존재했다.

 

[나보다 운이 안 좋은 사람은 없을 거다. 40년을 개고생하며 살다가 딱 그저께 빛 좀 보나 싶었는데 이렇게 세상이 멸망하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나를…더보기]

 

  불운. 잭은 적어도 자신은 출생으로부터 29년간 무탈했으니 이 댓글을 쓴 사람보다는 운이 좋았겠지만, 지난 10년간은 꽤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불운에 감사했다. 자신처럼 무난하게나마 불운한 사람이라면 내일 수십억 명의 인류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리라.

 

-2023. 2. 22.

 

 그리고 그것은 오산이었다. 상위 5%에 드는 건 학창 시절 외에 없던 일인데. 하필이면 이번에는 그 자그마한 숫자 안에 속하게 되었다.

 

 잭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은 확실히 운이 나쁘다고. 그게 아니라면 인류의 단 5%만이 며칠의 시간을 더 허락받는데 하필 죽이라고 발 뻗고 얌전히 기다리던 자신이 될 건 뭐란 말인가. 심지어는 밥도 먹지 않았는데. 그를 알리듯 배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살아남았나 싶은 와중에도 배고픈 건 싫어서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 한 번씩 잔뜩 쟁여놓은 먹을 것—다량의 인스턴트—이 그저께 똑 떨어졌고, 어차피 죽을 거니 뭘 더 살 필요도 버티던 게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적어도 잭에겐 자신의 생존이 행운 하위 5%로 여겨졌다.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시체를 볼 각오 역시 했건만 모든 게 증발해버린 듯했다. 하긴, 100명 중 단 5명만이 생존했다. ‘남은 사람들' 중 50%라 했고 인류는 지난 24시간 동안 가장 높은 살인율과 자살률을 갱신했을 터이므로 실제로는 100명 중 한두 명 꼴일지도 몰랐다. 잭은 외롭다는 기분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다소 적막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어폰을 갖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래도 장 보는 길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아무도 없는 편이 낫다는 사실만이 자신을 위로했다.

 

 다행히 마트의 문은 열려있었다. 부서진 채였다면 잔해를 피하면서 안까지 들어서는 게 번거로울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마트의 CM송은 직원 하나 남지 않은 채로도 울려 퍼졌고, 채 치우지 못한 카트들 속에는 결제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잭은 그 중 소세지를 챙겼다. 팬케이크 가루랑 달걀까지 있으면 좋았겠지만 보이지 않아 코너 안쪽까지 들어가야 했다.

 

 아직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아 그런지 채소들은 나름의 싱그러움을 갖추고 있었다. 평소 채소라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섭취하는 잭이었으나 왜인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새싹 채소 두 팩가량을 챙기고 드레싱도 골랐다. 베이컨이 있는 매대는 두 칸을 건너뛰어야 했고 그사이에는 반려동물 전용 매대,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고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강아지 사료네?”

 

 그것은 실로 충동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잭은 제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키는 자신이랑 같거나 비슷한 것 같고, 나이는 최하 5살은 어려 보이는 것 같은 남성은 인류가 이 꼴이 나기 전에는 인기 꽤 좀 있겠다 싶을 정도로—비록 긴 머리가 호불호를 가르겠으나 헤어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잭의 입장으로서는 그조차 잘 어울리게 보이는—미형이었고, 수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보였다. 반쯤 머리칼이 차분한 검은 빛과 생머리인지라 이런 상황에조차 평화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자신은 그 여상함에 말을 걸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고 뒤늦게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마지막에는 평소 안 하던 짓을 한다고 그러지 않던가.

 

“아, 강아지를 키워서요.” 그리고 다행히, 잘생긴 남자는 성격 역시 좋은 듯 했다.

“진짜? 무슨 강아지? 아, 잠깐. 기다려봐.”

 

 내가 맞춰볼게. 잭은 무언가 재미있는 마술을 보여줄 것처럼 뜸을 들이던 잭은 형편없는 답을 내놓았다. 딱히 평범한 사람, 아니, 사람 같지가 않아서인지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이제는 더 나빠질 상황도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음…말티즈?”

“전혀 아니에요.” 남자가 정색했다.

“에 진짜? 그럼, 뭔데?”

“보더콜리요.” 그렇게 말한 남자의 표정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꼭 그만큼 보드라운 털덩이들을 생각하듯. “아주 귀여워요.”

“헤에,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보러 가도 돼?”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기사, 황당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황당한들 갑자기 인류의 태반이 사라진 현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혹은 잭과 마찬가지로 더 나빠질 게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네.”

“밥도 얻어먹어도 돼?”

“네,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괜찮아.” 잭은 남자의 카트를 들여다봤다. 생수 몇 병과 강아지 용품만 있는 그 안에 자신이 고른 소세지를 쌓아 올렸다. “고기만 있으면.”

“음, 네. 좋아요.”

“좋아, 그런데…. 이름이 뭐지? 난 잭 마틴 클라크인데.”

 

 갤러해드 셰넌 아그로베일은 자신과 다른 번듯한 사람이다…, 라고 잭 마틴 클라크는 평가했다. 실제로 갤러해드는 잭이 착각하는 것만큼 올곧거나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사람 좋은 척을 한다지만 평소였으면 다짜고짜 반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저 아십니까? 하고 아주 싸늘한 표정을 지었겠지. 이런 당연한 대처를 제하고서도 아그로베일의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살가운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냥, 갤러해드는 왜인지 기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잭 마틴 클라크를 평가했다. 근거 없이 맞출 것처럼 떠벌려놓더니 정작 돌아온 말티즈라는 터무니없는 답에는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인류의 95%가 무로 돌아갔음에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세 마리의 천사들을 얘기할 기회가 생기고, 그렇게나 싫어하는 소란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까닭일까?

 

“이거 계산해야겠지?” 또는 간만에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 이라고 해도 되겠다.

“글쎄요. 쓸 사람도 없을 텐데….”

“그래도 좀 찝찝하니까.”

 

잭은 기어이 구깃, 도 아니고 꼬깃한 지폐를 좍좍 펼쳐 아무도 없는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CCTV가 감시하고 있다고 해도 이젠 그걸 돌려볼 사람조차 없을 텐데. 인적 사항을 확인할 경찰도, 재판을 진행할 시간도 없는데. 갤러해드는 잭이 좀 바보 같다 생각했고 그것 역시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말 한마디에 수  천가지 의미를 섞는 사람들 보다야 훨씬 다루기도 쉬웠고, 어디 가서 부끄러워할 솜씨는 아니라지만 아주 빼어나지도 않은 요리에 박수까지 치며 감탄하는 것도 그렇게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피, 메리, 크리스가 잭을 좋아했다. 그래서 갤러해드는 여기 눌러앉아도 되냐는 잭의 물음에 그러라 했다. 어차피 그 유튜브 채널의 주장대로라면 남은 시간은 약 사흘에서 나흘. 그 정도는 눌러앉는다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했다.

 

-2023. 2. 23.

 

 잭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잘 때는 몰랐는데 중간에 뒤척이다 악령이랑 눈이 마주쳤다. 덕분에 일찍 깼다. 물론 그건 악령 같은 게 아니라 짚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루돌프였다.

“왜 저런 걸 사? 얼굴이랑 취향이 따로 노네.”

“저런 거라뇨.”

“불길하게 생겼잖아. 저주 인형 같아. 나도 골동품 같은 건 사는 편이지만 넌 더하네. 오컬트 물품?”

“오컬트 아니라니까요.”

“아니, 누가 봐도 저주 걸게 생겼으니까. …억.”

 

 남의 소비에 다소 무례한 말을 하던 잭은 옆구리를 찔리는 것으로 응징당했다. 짚 루돌프의 존재도 존재지만 해도 말로만 사람을 공격할 것 같은—과거의 영광이 되었으나 변호사로 한 발 날렸던 잭은 그정 도는 파악한—사람이 물리적인 행동을 보일지 몰랐다. 게다가 손이 커서 그런가? 조금 아픈 것 같았다.

 

“이거 폭력이야!” 그래도 이건 엄살이다.

“아닌 걸 맞다고 우기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잭은 대놓고 무시했다.

“아프니까 과자를 먹으며 쉬어야겠어. 어제 마트에서 봐둔 과자가 있는데….”

“어제 장 봐놓고 또 나가자고요? 심지어 낮도 사라졌는데?”

 

 그랬다. 오늘은 세상에서 낮이 사라진 날이었다. 그래서 잭은 어둑함 속에 짚 루돌프를 마주쳐야만 했고,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것이다. 둘은 비상용 손전등을 사이에 껴두고 얘기하고 있었다. 담력 시험 같다는 잭의 말에 갤러해드는 별로 무섭지 않으신가 보네요. 라고 했고 잭은 대꾸했다. 그러는 넌? 돌아오는 답이 조금 늦었다. 저도 그렇네요. 뜸을 들인 건 거짓을 가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둘 다 이 꼴이 되어서까지 덤덤한 것이 기묘한 기분을 선사해서였다.

 

“고양이 때문에 그래?”

“…누가 고양이 때문이래요? 가요.”

 

 어제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둘은 길고양이 무리를 만났다. 인류가 사라진다고 했어도 동물들이 사라진다는 말은 없었던 게 문득 떠올랐다. 강아지를 키우기 때문인가? 잭은 동물을 키운 적 없었으므로 그의 얄팍한 견해로는 갤러해드가 보이는 오묘한 태도를 그렇게밖에 정의내릴 수밖에 없었다. 피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가지도 않는 게, 정작 경계해야 할 낯선 사람인 자신을 두고 엄한 걸 주의하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엔 아무 말 않고 짐을 든 채 돌아가던 잭은 지금 그 순간을 톡톡히 도발로써 활용하고 있었고, 갤러해드는 그에 단단히 넘어갔다.

 

“아야, 뭐야?” 뭐든 한 번이 어렵다던가. 잭은 재차 찔러오는 손가락에 손을 들어 제 허리춤을 문질렀다. 이번엔 억울한 얼굴이었다.

“과자만 산다면서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 아니면 최후의 만찬 몰라?” 확실히 그렇게 말한 적은 없긴 했다. 잠시 다른 할 말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갤러해드의 눈에 무언가 들어섰다.

“…피어싱도 그렇고, 기독교에요?” 잭의 오른 귓불에 달린 검은 십자 피어싱을 의미하는 거였다.

“뭐 반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반쯤 맞을 건 또 뭐람. 하지만 잭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며칠 뒤에 세상이 망해서 다행이야.” 잇는다기엔 생뚱맞은 말이긴 했다.

“왜요?”

“한 달 뒤에 망했어 봐. 이 고기들 말야. 아무리 냉장 보관을 해도 상해서 썩은 내가 났을걸. 해산물은 더 했겠지. 마트 입구부터 냄새가 나서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그러면 결국은 아사하게 될걸?”

 

 갤러해드는 자신과 전혀 다른 것 같은 잭이 조금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던 날. 이제 어떡하냐며 울음을 터트리거나, 마지막이니 자신을 흠모하고 있었던 걸 말해야겠다거나, 겨우 안정기에 들어섰는데 이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야 훨씬. 그런 게 아니라면 저렇게 멸망을 쉽게 입에 담을 리 없다. 잭은 갤러해드가 아무런 말이 없자 슬쩍 눈치를 보며 구이용 안심 400g을 돌려놓았다.

 

 갤러해드는 그제서야 고개를 저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면서요? 잭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가 사양 말고 닭 윙까지 담았다. 맥주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갤러해드의 요리실력이 객관적으로 좋은 건지 아니면 맨날 인스턴트만 먹다 집밥을 먹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몰라도 갤러해드의 요리는 맛있었다. 아, 제3의 선택지로 ‘함께 먹어서.’ 도 있었다.

 

 길고양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좀 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 없어 가로등에만 의존하는 길가는 어두웠지만  으슥하거나 불길하지 않았다. 공장들이 대개 가동을 멈췄기 때문인지 별빛이 더 환한 것 같기도 했다. 태양이 없는데 어떻게 빛을 뿜어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초승달도 환했다. 햇빛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하는 거나 다름없다던 어느 댓글과 다르게 나름 살만했다. 그 전엔 흔했던 차 한 대 지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낮보다는 위험 요소가 사라진 세계가 이럴까 싶었다. 그 광경은 평화였다.

 

“조용하네. 세상에 우리 둘뿐 같아.”

“그러게요.”

“흐음….” 잭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고, 그에 앞을 보며 걷던 갤러해드가 고개를 돌렸다. 장바구니를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낸 잭의 손에는 맥주 캔이 들려있었다.

“저기, 클라크 씨?”

“클라크가 뭐야. 잭이라 해. 그래서 왜 불러?”

“여기서 술 드시려고요?”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잭은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갤러해드는 조금 어이없단 듯 바라보았으나 잭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갤러해드를 종용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러겠어? 하지만 딱히 이러고 싶단 생각은 없었는데요. 에이, 빼지 말고. 설마 술 약해서 그래? 걜러해드는 또 도발에 넘어갔다. 그래도 그간의 대화로 잭이 술을 못 먹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일 꼰대는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사람이란 걸 사업가의 통찰력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휘둘리는 부분도 분명 있다고, 갤러해드는 확신했다.

 

 이번에는 잭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맥주 두 캔 반 먹고 취하다니. 물론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었겠다만 그게 갤러해드일줄은 몰랐다. 생긴 건 술 한 궤짝도 마시고 남을 것 같은데…. 그정 도로 취한 건 아니라 주장했고 잭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진 않았지만 잭은 반쯤 갤러해드를 들쳐맨 체 돌아가고 있었다. 도보로도 멀지 않은 거리라 다행이었다.

 

“잭 씨….”

“응, 주정뱅이. 왜.”

“주정뱅이 아닌데요….”

“원래 취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

“진짜 아닌데….”

 

 아, 이거 녹음해서 들려줘야겠다. 잭은 슬슬 어이없기보다는 웃기기 시작했고 종래에는 내일 갤러해드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장바구니를 손목에 걸어 묵직한 손으로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내는데 귓가에 목소리가 스쳤다.

 

“있잖아요, 전…제가 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순간에는 잭 마틴 클라크 역시 갤러해드 셰넌 아그로베일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잭은 그 말에 우두커니 서 있다 녹음기가 아닌 노래를 틀었다. 랜덤으로 설정된 플레이리스트에서 다음 곡 버튼을 몇 번 누르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휴대폰 볼륨을 최대치로 설정한 잭은 꽉 막힌 주머니가 아닌 트인 장바구니에 휴대폰을 내려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2023. 2. 24.

 

 구이용 소고기는 아침상 스튜에 들어가게 되었다. 갤러해드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그전까지는 갤러해드가 훨씬 일찍 깼으므로 잭은 일어나면 머리가 뻗치는 스타일인지 그제야 안—갤러해드는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날의 아침 식사는 스튜로 결정되었다.

 

 어두움에 눈은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지만 문제는 심리적인 답답함이었다. 하물며 전기도 끊겨버려 더 그랬다. 그럴 것 같지 않아서는 홈쇼핑에서 샀다는 무드등은 넓따란 집의 방 한 칸 정도만을 책임졌기에 자연스럽게 행동은 굼떠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갤러해드의 말은 여전히 술기운이 남아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모기약하고 라이터를 쓰면 밝아진다던데….” 잭은 그걸 농담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진심이었는지 모기약 스프레이를 들어 올리는 것에 기겁하며 막아냈다.

 

 어떻게? 손을 잡아서. 그리고 잭은 자신이 조금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기류가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하긴, 다 큰 성인 남성 둘이, 그것도 만난 지 사흘째인 남성 두 명이 손을 잡을 일은 없었다. 타이밍을 놓친 잭이 어정쩡하게 손을 떼어내며 적반하장으로 나섰다.

 

“그러길래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래? 집에 불 지르고 싶어?”

“하지만 유튜브에서….” 이래서 일반인들이란. 유튜브에서 본 정보를 걸러낼 줄 모른다니까. 이상한 걸로 혀를 찬 잭은 됐어. 모기약은 꺼낼 생각도 마. 쐐기를 박았다.

 

 TV에서는 몇 부작으로 기획된 남극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2부의 주인공은 펭귄인 듯했고, 현장에서 펭귄의 습성에 대해 설명하는 연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붉지 않았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남극 같은 데 가면 얼굴이 얼 것처럼 추울 거라 생각했는데. 옷을 껴입긴 했지만 그 얼굴만 보자면 차라리 잠시 붙잡았던 손이 더 차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갤러해드는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눈과 달리 서늘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아니면 수족냉증이라는 가능성도 있겠지. 자신이 손에 대해 10대 학생처럼 꽤나 의식하고 있음을 인정한 잭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람 손 만지는 거 오랜만이야.” 잡는 것도 아니고 만지는 거라는 직관적인 단어 선정에 갤러해드는 조금 의외란 듯한 표정을 했지만 표현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다.

“오랜만이요? 의외네요.” 그에 잭 역시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뭐가?”

“손 정도는 아무나랑 잡을 줄 아셨는데요. 저한테 말 거셨던 것처럼.”

“얌마, 내가 그렇게 가벼운 남자로 보여?”

“칭찬의 의미였는데요.”

 

 사실 돌이키면 그렇게 보일만도 했다. 자신은 갤러해드를 몇 년 만에 만난 동창처럼 대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건 39살의 잭 마틴 클라크가 보일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10대 때에는 나름 인간 친화적이었다지만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닐 성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잭을 그렇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짓을 하게 만들었고 이어지는 대화, 혹은 회고도 마찬가지였다.

 

 잭은 정의를 꿈꾸는 변호사였다. 선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적 없으나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굳이 범죄가 아니라도 이기심으로 타인을 해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도. 그런 잭은 후배가 옳은 소리 좀 했다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고 항의했다. 먹고 살 정도로만 벌면 됐지 돈에 눈이 멀어서 과장하여 사람들에게 불안을 심고 그것으로 계약을 따내는 것이 변호사로서 옳은 태도란 말인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었고 더욱 나빠져만 갔다. 결국 한 달 뒤 후배는 로펌을 관두었다. 후배는 잭에게 오히려 후련하다며 고맙다고, 미안하다 말했지만 잭은 자신이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생각했다. 그걸 견딜 수 없어 퇴사했다. 그리고 변호사란 직업을 관두었다. 워커홀릭이라 벌어둔 돈이 상당했고 원래 사치를 몰랐던 소비가 더욱 바닥을 치게 된 편이라 그로부터 10년을 버텼지만 슬슬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순 없다고 생각하던 때에 진짜 끝이 다가왔다.

 

“어제 네가 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했지?” 잭은 끝이 도래해서야 후련하다던 그 후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같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므로. “나도 마찬가지야.”

 

 저녁에는 감바스를 먹었다. 그러고 나서는 혼자 살면서 욕실이 두 개 딸린 호화로운 집 덕분에 동시에 씻었음에도 갤러해드의 머리칼이 한참 늦게 말랐다. 잭의 마른 이파리와 닮은 회갈색 머리는 뒷목을 다 덮지 않을 정도로 짧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고, 잭은 자신이 말려주겠노라 했다.

 

잭은 새삼 갤러해드가 자신과 전혀 다르다 생각했다. 애매한 색과 대조되는 선명한 머리칼. 푸른 눈과 다른 붉은 눈. 그런데 눈매는 제 쪽이 유하며 저쪽이 날카로운 것까지.

 

“붉고 검고 하얗고…백설공주보다는 뱀파이어 같네. 눈 때문에 그런가.”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칭찬이에요?”

“그럼, 당연하지.”

 

 이후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비록 갤러해드는 친해진다는 감각을 잘 알지 못했으며 잭으로서는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이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으나 둘 다 같은 생각을 했다. 둘은 꽤 친해졌다고.

 

-2023. 2. 25.

 

“오늘은 고통이 사라진댔나….”

“네, 아무래도요.” 그리고 비몽사몽한 갤러해드의 말에 잭은 곧장 볼을 꼬집었다. 일찍 일어나는 편인가 싶었는데 실은 아침잠이 굉장히 많은 편이란 걸 어제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오, 진짜네.”

“잭 씨??”

 

 볼이 다 붉어질 때까지 꼬집은 잭은 신기하단 듯 말했고 갤러해드는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아니, 저게 모기약으로 화염방사기 만드는 거랑 뭐가 다르지? 잭이 알면 전혀 다르다고 할 의문을 품은 갤러해드의 앞으로 잭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감이 잘 안 나서. 사실 어제도 그랬지만. 돈이 사라져도 뭐랄까, 어차피 쓸 데가 없어서 그런가?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마트에 두고 온 것도 사라졌겠지? 사라진 것들은 사라진 사람들이 있는 세계로 갔으려나. 사후세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채널에서는 보관이라는 표현을 썼으니까. 그런 거라면 고통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낮만 있다면 무척이나 덥겠군. 자기도 힘들 거고. 잭은 경악하는 갤러해드를 두고 좋을 대로 중얼거렸다. 갤러해드는 잭이 스스로 선하지 않다 평했지만, 역시 선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아침을 준비하기로 했다. 사라진 사람들의 고통이나 더위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악하기란 힘들었다. 아침은 푹신푹신한 오므라이스였다.

 

“어떻게 이렇게 오므라이스를 푹신푹신하게 해?”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러엄. 난 네가 해준 건 다 맛있더라. 그리고 푹신푹신한 건 기분이 좋잖아. 이 소파도 푹신푹신하고. 푹신푹신….”

 

푹신푹신… 중얼거리며 소파 위에서 몸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거리던 잭이 우뚝 멈추고 말했다.

 

“케이크 먹고 싶다. 푹신푹신한 거.”

“네?”

“케이크 만들 줄 알아? 과일은 있고, 음, 크림은 없으니 수플레 팬케이크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낯짝에 팬케이크 3장은 깐 것 같은 부탁이었다.

 

 잭은 그 대가로 엄청난 설명—버터 1그램의 차이로 빵이 죽는다거나 하는—을 들어야 했지만, 덕분에 팝콘 대신 딸기 수플레 팬케이크를 먹으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단 것을 싫어하는 갤러해드의 기호로 시트는 달지 않았고, 잭은 알아서 찬장에서 찾아낸 메이플시럽을 듬뿍 뿌렸다.  갤러해드로서는 지인에게 선물 받아 반년이 지나도 두어스푼 쓸까 말까 했던 값비싼 메이플시럽의 1/3정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흠뻑 젖은 시트는 촉촉했고 잭은 내 생에 최고의 팬케이크다, 영광으로 알아도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갤러해드의 어머니가 어릴 때 종종 보여주시곤 했다는 영화 한 편을 본 뒤 잭은 종이와 연필을 찾았다. 갤러해드는 그걸 보고 감상평이라도 쓰려는 건가 싶었지만 종이 위에 그려지는 것은 그림이었다. 갤러해드는 영화와는 전혀 연관 없는 듯한 그 풍경이 자신의 집을 나타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해피, 메리, 크리스. 가만히 있어봐. 지금 너네 그리고 있거든? 이거 원래 돈 내야 하는데 화폐가 사라져서 내가 공짜로 해주는 거야.”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작명 센스였다. 메리 크리스 마스도 아니고 해피 메리 크리스라니.

“왕!”

“영화 속 장면을 그리실 줄 알았는데요.”

“응? 그 정도로 기억력이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그리고 마지막이니까. 혹시 몰라? 나중에 내 그림이 인류의 역사에 남게 될지.”

 

 이후로 잭은 한참이나 집중했다. 평소 웃을 때는 가벼워 보이는 듯했던 얼굴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느껴진다고, 옆얼굴을 보며 생각하던 갤러해드는 완성된 그림에 의문을 뱉었다.

 

“끝이에요?”

“응. 색연필 없다며? 어쩔 수 없지.”

“아니, 그게 아니라….” 갤러해드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은 나쁘지 않았다. “잭 씨가 없는데요.”

“아아, 그거 말이지. 어차피 내 집도 아니고… 원래 찍는 사람은 사진에 안 담기는 법이잖아?” 잭은 대수롭지 않단 듯 말했으나 어쩐지 갤러해드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새 종이와 연필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제가 그려드릴게요.”

“어, 진짜? 그러면 또 내가 거절을 못하지.”

 

잭의 기대는 정확히 10분 만에 꺾였다.

 

“갤러해드 셰넌 아그로베일, 지금 맥이는 거냐?”

“아니에요!” 갤러해드는 억울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선을 겹겹이 쌓은 졸라맨은 어딜 봐도 잭답지 않았다. 그러나 잭은 할 수만 있다면 그 그림을 코팅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너 다음 생엔 그림 좀 배워야겠다.”

“다음 생이요?” 아 참, 그 채널에서 새로 시작, 뭐 그런 말을 했었지. 갤러해드가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엉. 아니면 내가 가르쳐줄게. 지금은 뭐…. 하루 배워서 되겠어?”

“음, 그러죠 뭐. 공짜로 가르쳐주시는 거죠?”

“돈도 많아 보이는 녀석이 너무한다. 그래, 그래. 아주 벼룩의 간을 떼어가라.”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비록 허황된 미래라도.

 

 코팅은 불가능하더라도 액자에 끼워두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갤러해드의 집에 빈 액자는 없었지만 사진을 따로 빼둘 액자 정도는 있었다. 문제는 그게 가족사진이라는 점이지만. 갤러해드는 집 안에 사진을 두는 스타일이 아닌듯 했다.

 

“괜찮겠어? 가족사진인데….” 아무리 아부지와 사이가 안 좋다곤 했지만, 오히려 잭이 안절부절못했다.

“네. 해피, 메리, 크리스도 가족이니까요.” 그 말에 잭은 납득했다.

 사실 해피 메리 크리스 단독 사진도 있었는데 그걸 빼겠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아끼는 것 같아서. 그것도 아니면 어지간히 아버지를 싫어하거나. 실은 단순히 그런 이유들로만 기어이 액자에 걸겠다고 하는 건 아닌 줄은 모르고. 마지막을 기념하고 싶기는 갤러해드도 매한가지였다.

 

-2023. 2. 26.

 

 일어났을 땐 마왕의 개 채널에 새로운 글과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글은 투표 형식이었다.

 

마왕의 개 · 3시간 전

당신은 행복한가요?

[네]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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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요?? 싸이코야 당신때문에 내 가족들이 죽었다고] 좋아요 421

[솔직히.. 전 괴로웠는데 뭔가 좀..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행복까진 몰라도 괜찮은 것 같아요] 좋아요 542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히 반으로 갈렸다. 누구 잘사는 꼴 보기 싫었는데 죽게 해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본 갤러해드는 조금 싸이코패스 같다고 했고 잭은 동의했다. 이게 뭐가 행복하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댓글도 분명 있었지만 의외로 그렇게 비난만 있지는 않았다.

 

 영상의 내용은 그랬다.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살려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깨닫는다면 좋겠다. 두어번정도 영상을 돌려본 잭은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두었다. 투표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멸망의 날. 시차를 고려한 것인지 지금까지의 실종, 증발, 소멸은 00시가 아닌 반나절에 걸쳐 진행되었기에 멸망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그러나 둘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인류가 별 속에 흩어진다던 음성. 그리고 그를 예고하듯 하늘은 언젠가 잭이 샀던 펄 잉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하는 멸망이라기엔 환했고, 지속 가능한 일상이라기엔 눈부셨다.

 

“예쁘네. 사진 찍을까?”

“네.” 평소 자연경관에 큰 흥미를 갖지 못하던 갤러해드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답에 잭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어느덧 배경 화면은 갤러해드가 그려준 자신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잭이 사진을 찍는 동안 갤러해드는 커다란 그릇에 물과 사료를 담고 있었다. 인류가 별 속에 흩어진다고 했지 동물들이 사라진다곤 안 했으니까. 해피 메리 크리스는 똑똑해서 사료를 잔뜩 뜯어둬도 한 번에 필요한 만큼만 먹을 거였다. 하지만 잭은 이 강아지들이 조금은 멍청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똑똑하다면 갤러해드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아차릴지도 모르니까. 간식까지 줄지어 늘어지는 것에 해피 메리 크리스가 먹는 거야? 먹어도 돼? 라고 적힌 표정으로 꼬리를 잽싸게 흔들어댔다. TV를 킬 수 없어 간혹 강아지들의 헥헥대는 숨소리만이 들렸다. 둘 사이에 별다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 끝을 기다릴 뿐이다. 멸망이라는 행선지의 열차에 오른 여행객처럼.

 

 검기만 하던 하늘이 남색으로 푸르게 개이고, 어쩐지 창 안으로 바람이 스미는 것 같아 잭은 중얼거렸다. 좀 춥네. 그에 갤러해드는 옷장에 잘 개어두었던 담요를 들고 잭에게 건넸다.

 

“너도 같이 두르지 그래?”

“네? 하지만…전 안 추운데요.”

“너 몸이 차가운 거 같더라. 그래서 그럴걸. 같이 둘러. 어차피 크기도 크구만.”

 

 하운드투스 무늬가 수놓아진 갈색의 담요는 188cm—얼마 전에 확답을 구해낸—의 장신의 남성 둘을 충분히 감쌌다. 강아지들은 온기를 찾아 잭의 지근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갤러해드의 손 역시 잭의 손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왜 그래?”

“손잡아도 되나 해서요.” 잭의 푸른 눈이 두어번 깜빡였다. 그 눈동자에 유성이 비추어졌다. 잭은 자신이 그 손을 붙잡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역시 서늘한 손이었다. 갤러해드는 따뜻하다고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휴대폰에서는 갤러해드를 업고 들어오던 날 재생됐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온통 침묵이었으나 요 며칠 그러했듯 어색하지 않았다. 잡은 손은 간헐적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잭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에 없던 안정을 느낀다.

 

I'd give you the Sun if you asked me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태양을 줄게요

You could have all of the time

당신은 모든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You could have the stars and the trees

별들과 나무를 간직할 수도 있을 거예요

When dividing up the Universe….

우주가 흩어질 때…

 

 잔잔한 음 속에서 문득 어느 생각이 나레이션처럼 잭의 머리에 머물렀다. 왜 마왕의 개 채널에서 그런 글을 올렸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을 살려둔 채로 고통이며 돈 같은 걸 지워버렸는지도. 예정된 멸망 속에서 고통이 아닌 행복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살려둔 게 아닐까…. 하고. 답은 알 수 없지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도. 그러면 갤러해드도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니까.

 

“다음생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 진지한 목소리에 그렇지 못한 말이 뒤따랐다. “넌 머리 좀 자르고 다녀라.”

 

잘 생겨서 머리가 다 가리네. 꼰대보다는 얼빠에 가까운 소리에 갤러해드가 반발했다.

 

“긴 머리가 어때서요? 그러는 잭 씨야말로 긴 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뭐,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그건 아니고요.” 갤러해드의 시선이 첫날 말티즈를 언급했을 때처럼 싸늘해졌다.

“야! 너무하다.”

 

 그러던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왁자지껄한 웃음 뒤에 손에 풀린 힘을 다잡았다. 이제 유성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무언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그러나 잭은 여전히, 창밖을 볼 의지가 없는 듯했다. 아니, 둘 중 누구도 창밖을 보고 있지 않았다.

 

“너 왜 하늘 안 보고 날 보냐. 역시 내가 잘 생겨서 그렇지.”

“그러는 당신은요?”

“글쎄….”

 

 별과 함께 붕 뜰 듯 가볍던 웃음이 조금 흐릿해진다. 하지만 직전보다도 따뜻한 빛이었다. 잭은 마주한 갤러해드의 두 눈으로부터 밤하늘을 본다. 지나칠 정도로 빛나던 하늘이 빛을 잃은 눈동자 위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네 눈에 다 보여서…라고 해둘까.” 곡도, 우리도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은 건, 맞잡은 손이 있기 때문이리라.

 

You could have mine

당신은 나의 것을 가질 수도 있겠죠

You could have mine

당신은 나의 것을 가질 수도 있겠죠

You could have mine

당신은 나의 것을 가질 수도 있겠죠

 

 영화로 치자면 배드 엔딩이었으나 더는 불운하지 않았다. 후회되지는 않았으나 이 눈을 조금 더 길게 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아쉬웠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는 끝이란 건, 생각보다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미련이 남지만 슬프지는 않은 행복. 다음 생은 이보다 나으리라 기대해봐도 좋을 정도의 감각. 딱 그만큼의 감정이 두 사람의 손에 꺼지지 않는 빛으로 쥐어져 있었다. 오로지 그것만으로도 해피 엔딩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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