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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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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1. 20.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내일의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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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멸망한 세계 속에 두 사람

멸망한 세계

제드 파보코크, 스카일라 V. 밀레디아

샤토, 치

원인 불명의 질병이 돌았다. 시작은 단순한 열병과 두통, 감기였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아픔은 쉽게 낫지 않았고 끝내는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하나나 둘이었을 때는 불행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었다. 열 명, 스무 명, 오십 명, 백, 천, 만으로 단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병은 재난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싸움에서 인류는 패배했다. 병에는 이름이 붙었고 동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범한 고양이부터 켄타우로스까지 종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것들을 집어삼키는 병이었다. 주의하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었으나 방침은 대체로 쓸모가 없었고 온갖 미신이 바람에 떠돌았다. 기도는 위안이 될 수는 있었으나 해결해 줄 수는 없었고 사태는 악화되기만 하였으며 마침내 패배를 시인했을 때는 전세계의 인구가 절반은 사라진 상황이었다.

 

제드는 거무죽죽한 강낭콩 절임을 놋쇠 스푼으로 휘적였다. 입맛이 있을 리 만무했다. 눈앞의 식사는 ‘먹을 것’의 속성만 지니고 있었다. 맛있지도 않고 영양가가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있으니까 먹을 뿐이다. 투정은 할 수 없는 위치였음에도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느낌이 사라지진 않는다. 이성과 예의는 아직은 잘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철없는 투정을 부리지는 않았다. 눅눅한 식사를 기계적으로 소화할 따름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같은 강낭콩 통조림을 들고 있는 연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머쓱했다.

 

“제드. 무슨 일 있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스칼라. 오늘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겠지.”

 

스카일라는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푸른 눈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두 사람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도 못한지 한 달이 넘었다. 그전에 마주친 사람이라고 해보았자 황야를 돌아다니는 보따리꾼이 전부였다. 말이 좋아 상인으로 부적절한 가격을 부르는 괴팍한 인간이었다.

 

국가의 의미는 축소되었다. 생필품은 자급자족으로 이어졌다. 편리하게 어딘가에 가서 돈을 주고 산다는 방식은 먹히지 않았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야 했으며 땅과 숲에서 입에 넣을 것을 구해야 했다. 머글의 혼란은 마법사보다 심각했는데, 온갖 곳에서 폭력 사태가 난무했고 약자는 가장 처음 희생되었으며 도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잠시 우위를 차지하였으나, 그도 오래가지 못하여 지금은 모두가 생존자라는 이름 아래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는 차별이 존재할 수 없었으며 병 앞에서는 누구라도 무릎을 꿇었다. 평등의 극지점이었다. 무력은 간단하게 보여지는 힘의 증명이었고 지식과 지혜는 안전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인간은 어느 때라도 사회를 만들어 왔으니, 고대로 회귀한 것처럼 생존자들은 소규모 무리를 짓고 힘과 지혜의 타협을 꾀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아웃사이더로 떠돌았다. 스스로 무리에 끼기를 거부한 자, 금칙을 어긴 자, 밀려난 자. 사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온 생물이 황폐해진 문명 속에서도 인간은 악착같이 문명을 유지하며 숨을 붙이고 있었다. 물론 마법사와 머글을 막론하고 권력이 있다는 부류들 국가의 보호-거주지를 분리한 체제-를 받으며 이전과 같은 삶을 일부분 꾀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언제 스러질지 모를 일이었다. 불안은 모두 위에 떠 있었으나 돈과 귄위에 따라 다른 문제가 되었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불안은 발치에 머물렀다.

 

 

 

 

 

과학이 후퇴한 시대에도 마법은 살아있었다. 기술발전을 이루기 전에도 마법은 존재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법 역시 질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인 모양이었으므로 마법사들에게는 죽음 이상의 공포로 다가왔다. 마법사들은 본디 혈통을 놓고 싸움을 벌였던 이들이다. 마법은 존재 증명이었으며 뿌리의 뿌리 끝이었으니 죽어서도 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오명일지, 순수한 혈통을 바라는 마법사들에게는 절망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영국 마법부는 꽤나 그럴싸한 마법약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를 했었다. 일시적이고 치료된다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디인가. 마법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법사는 많았고 임시방편은 불티나게 수요가 많았으며 지금은 암거래의 대상이 됐다. 머글의 수뇌부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통제하는 체제로 변모하여 제 국민들을 가지치기하는 상황이었으니, 마법부라고 별다른 수가 있었을까.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제드와 스카일라는 간신히 외곽으로 빠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파보코크 소유의 외진 별장에 머무르면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마저도 우편 부엉이도 수가 줄어드는 와중에 간신히 알아낸 소식이었다. 어른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으며, 돌림병으로 봉쇄되는 지역이 빠르게 늘어나는 바람에 첫 연락 이후는 알 수 없었다.


마법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때는 그나마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제드는 장식품으로 변모해 가는 지팡이를 견디지 못했다. 휘두를 때마다 위력이 약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가볍게 해냈던 주문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횟구가 늘어나면서 자존심에도 타격을 입었다. 이제는 루모스나 붙이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 완전히 마법이 사라져도 제드는 마법 지팡이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제드는 낡은 소매 끝을 걷어붙였다. 억지로 입에 넣던 강낭콩은 남기고 말았다. 남루한 옷은 이전의 영광이 상실했다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겨우 먹을 것 하나가 입에 맞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편식 투정이나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도 별수 없는 기득권 출신이었다. 제 몫의 통조림을 비운 스카일라가 입을 열었다.

 

“상인 분이 사흘거리라고 했었죠.”

“전염병이 돌았다던 피난처 말이지.”

“네. 여기도 오늘 안으로 떠나야겠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드는 남은 음식을 작은 통에 옮겨 담았다. 갈 길이 멀다. 이동마법은 고사하고 포트키나 벽난로를 통할 수도 없으니 방법은 두 다리만이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다. 간소해진 짐을 꾸리고 커다란 배낭을 멨다. 탁한 녹색에 얼룩진 가방이 등에 둘렀다. 예전 같았다면 멋지지 않단 이유로 소지할 일 없는 가방이었으나 지금은 이만큼 유용한 것도 없었다. 제드는 불을 지핀 자리를 밟아 껐다. 평생 인연도 없던 일들을 하나씩 배워나가느라 진을 뺐지만 반복하다 보면 몸에 익긴 했다. 옆에서 짐을 챙긴 스카일라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방위를 재고, 도톰한 재킷 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흔적이 남은 지도를 펴서 두어 번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쪽이라는 듯 제드를 살짝 보고는 앞장선다.

 

 

날씨는 좋았다. 햇볕이 적당하고 바람도 느슨하게 불었다. 발밑에는 차량의 부서진 잔해들이 밟혔고, 두 사람이 일어난 장소는 터만 남은 폐가여도 날은 좋았다.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멀리서 병마가 달려오고 있음에도 어딘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제드는 현실감 없는 마음을 침묵으로 대신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에 끝나가는 날에도 날씨는 화창할 것이다.


스카일라 빅토리아 밀레디아는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바다를 걷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것이 과거로 이루어진 단어가 되어버린 것은 이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스카일라는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바다를 타고 흐르는 소리와 모래에 밀려, 앞으로 걸어가던 순간을 사랑했었기 때문, 문득 과거의 잔상을 떠올리고 마는 것을….


작고 아기자기한 조개와, 파도에 떠밀려온 소라고둥 대신에 이제는 해가 갈수록, 주인을 잃고 제 기능을 잃고 가치가 떨어져 이제는 물건의 형태조차 이루지 못한 잔해들이 잔상을 걷고 튀어나왔다. 걸을 때마다 사랑했던 바다는 사라지고, 바람이 불면 불수록 숨을 내쉴 때마다 다 타고 남은 재와 먼지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걷는 거리마다 그것을 거리라고 칭하기 부를 정도로 민망할 정도로 그저 폐허와 잔해뿐이었다.


“그래도 상인 분께서 남는 것을 주셔서 다행이었죠.”

“음….”

“남는 것이에요, 괴팍하셨다고 하셨지만 나름의 선행을 베푸셨다는 걸요.”

“통조림과 말린 육포를 줄 때 나를 노려보던 눈빛이 선명하던 걸, 선행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지.”

“하지만…. 으음, 좋아요. 직접 거래한 사람은 제드니까요…. ”


선행이라 포장했으나, 결국 그들을 딱하게 여긴 동정이란 걸 두 사람은 알았다. 아니 사실 세 배, 네 배가 되는 가격에 변변찮은 물건들을 늘여두었지만, 세상은 이제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상인, 보따리군이라고 칭해졌던 이는 우리에게 목적지를 묻고선 태도가 바뀌었다. 아마 그들의 목적지로 가는 것이 어쩌면 제 발로 무덤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멋대로 추측한 게 아니었을까? 전염병이 돌아다녀 피난처였던 곳을 목적지로 삼은 이들이었으니. 상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었다가도 이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원래 사야 했던 몫보다 조금 더 얹어주었음을, 물론 그 과정에서 제드와 상인과의 말다툼과 시비가 있음을 굳이 논하지는 않겠다. 이제는 말라비틀어진 육포조차도 얻기 귀하다. 제 손에 남은 한 조각은 제드가 기어코 넘겨준 것이기에, 거칠고 비틀어진 육포를 꾹 누르자 비틀어졌다.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더듬거리며 잔해를 치우고 길을 걷자 한 달이 이제 곧 넘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그립다. 스카일라는 사람이 그리웠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섞여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것을 겪었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서…. 빛바래, 이제는 투박한 작대기에 불과한 지팡이로 짐이 떨어지지 않게 단단하게 고정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마법 역시도 이제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인데….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면, 마법사와 머글이 구분지어질 수 있을까?

 

쓸데없는 잡생각이었지만 스카일라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끔은 여전히 반찬 투정 엇비슷한 소리를 늘여두는 제 애인은 이 말을 꺼낸다면 아끼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보존해야 할망정 분명 오늘 하루 끝없는 논쟁을 해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스카일라도 사흘이란 애매한 거리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논쟁을 즐겁게 꺼내기 위해 몇 마디를 던지며 가늠해보았겠지만…. 그들은 오늘 안에 이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드물게 생각을 정리해 다음을 기약했다. 사람이 그리워진 감각은 뒤로 가고, 언젠가 다시 불쑥 나타날 것임을 알았으나,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했으므로.


스카일라는, 거절하고, 양보했던 낡은 목도리를 꼼꼼하게 조금 더 둘렀다. 두르고, 손에 쥔 나침반이 빙글, 빙그르르 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인 거 같아요. 제드, 하고 연인을 작게 부르자 고개를 돌아본 연인은 의아하게 제 물음에 답했다.


“방금까진 이쪽이 아니었나….”

“으음, 아무래도 나침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혹시 몰라 여분용 나침반을 꺼냈으나, 나침반 역시도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왜 이러지? 나침반을 어깨가 부딪히고 머리를 맞대며 바라봤으나, 나침반 두 개가 그런다고 하여 방향을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았으니….


“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길이 묘하게 다른 거 같지 않아요?”

“어떤 부분이?”

그의 연인이 다시 물었으나,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 꼭 마법처럼.


“지팡이를 들어봐야겠어요.”

어쩌면, 마법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혹여 전염병이 돌았던 피난처는 일부러 낸 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나 사람을 보지 못했으나 도착하지 못한 피난처. 사흘이나 남았지만, 여전히 끝이 없으나 묘하게 이어 붙여진 거같이 작위적인 거리…. 그래서 혹시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빛바랜 지팡이를 꺼내기보단, 제 연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는 게 더 빨랐다. 이번에는 될까. 마법을 부리려고 열 번을 시도하면 고작 두 번에서 세 번, 그마저도 강도는 비교하자면 제각각 달랐지만, 이런 기묘한 현상에는 한 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니, 물론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겨도 좋았으나 전염병이 세상을 덮치고 난 뒤에는 꼼꼼하게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게 좋았다.


“피니트 인칸타템.”

“오….”

“왜 이런 거리에, 인지 방해 마법이 걸려있는 거지?”

“피난처의 소문이 일종의 연막이 아닐까요…. 마법사가 아직 살아남아 있었나 봐요.”

 

 

부자연스럽게 잔해가 놓여있는 거리가 뚝 끊겼다. 두 방향을 가리키던 나침반 두 개는 이제 사이좋게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제 말에 묘하게 화색이 돋은 연인을 힐끔 바라보다, 이내 손을 이끌었다. 마법사를 마지막으로 본 건 정말 까마득하다. 좋아요, 이제 정말 가볼까요? 오늘따라 운이 묘하게 잘 풀리는 날이었다. 이제 날을 기록하는 건 의미가 없으나, 오늘 걸어야 할 거리를 걷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기에 꼭 써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쩐지 헤매는 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러게요. 하고 덧붙이는 말에는 고저 없이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이내 두 사람은 오늘의 기묘한 거리를 걷고 나서 하나의 희망을 품고 걸어갈 것이다. 날은 화창하고, 과거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람을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보다 오래된 마법을 마주한 건 정말 오랜만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과거 속에 남겨두었던 기억을 꺼내 감히 추억을 회상하였다. 마법을 발견한 건 정말 오랜만이어서, 추억을 회상하다 두 사람은 처음 말을 섞은 날을 떠올렸다, 그랬기하고 고개를 올려다보자 사랑하는 연인과 눈을 마주치자 동시에 바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이 끝나가는 날에도 두 사람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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