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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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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2. 31.
Evil, Continue.

05
라헤쥬
멸망할 세계
라비기노사 일라이어스, 헤이즈 로제 플레이시
마왕, 퓨
황금빛 잔을 든 손이 있다. 그 손이 천천히 움직이면 잔 안에 든 붉은 액체는 정처 없이 흔들렸고, 이내 손바닥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기울이면 그것은 맑은 개울 위로 쏟아져 내린다. 손바닥보다 작은 잔에 든 액체가 쏟아지면 얼마나 쏟아질 수 있겠냐만 그 잔에 든 액체는 꼭 그 바닥이 없는 것처럼 쉼 없이 쏟아져 어느새 잔을 들고 있는 자의 발치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이윽고 황금빛 잔을 개울 위로 내던지듯 떨어뜨렸다. 개울의 바닥에 가라앉은 잔에서는 쉼 없이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니 이윽고 그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은 온통 붉었다.
강의 하류. 물놀이를 하던 한 아이가 외쳤다. 엄마, 저기 좀 보세요. 물이 빨개요. 그에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던 여인이 말했다. 요정님이 꽃놀이하시나 보다. 주변엔 꽃이 절정이었으니 필히 그 꽃이 물 위로 떨어진 것을 보고 감탄한 것이리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손에서 떨어진 방망이는 물길을 따라 떠내려간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빨랫감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다.
"시,신께서 노하셨다!!!"
강이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대로 아이를 품에 안고 마을로 달려갔던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신의 분노를 샀으니 곧 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라 연신 중얼거렸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으로 붉은 강물이 묻었던 자신의 아이를 살려 달라 의원에게 빌었다. 아이의 다리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여인은 톡톡히 보았다. 붉게 물든 물 위로 떠 오르는 물고기들, 그리고 그것이 검게 변하고 이내 바스러져 흩어지는 것을. 오로지, 그 여인과 아이만이 보았다.
***
낡은 나무 문이 열리는 듯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키보다 다소 낮은 문을 숙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창문의 틀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있던 여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진다. 그에 비해 남자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기분이 좋은 것처럼 웃어 보인다.
"어딜 다녀온 건가요오! 찾았답니다아?"
"하하. 날 그리도 보고파 했을 줄은 몰랐는데."
남자는 여자가 앉아있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여자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런 남루한 곳에 묵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따라붙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야 방에 대한 불만보단 이 낡은 방에 혼자 남아있었다는 불만이 더욱 커 두 가지 불만 사항 중 한 가지에 대한 것을 먼저 뱉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단 말이지요.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것을 보며 남자는 다시금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래. 하는 달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러고 보니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여자의 시선이 남자의 붉은 눈동자로 향한다. 평소 눈을 마주하는 습관이 있는 것도 있었으나, 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저 붉은색이 들어간 이야기였던 탓이다. 여자의 이야기에 남자는 그래? 무슨 이야기였길래. 하고 물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맑았던 날씨는 바깥의 혼란을 그리기라도 하듯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강물이 붉게 변했다. 신이 노했다. 멸망이 도래할 것이다."
여자는 천천히 문장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창밖으로 향했던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눈동자로 향한다. 남자의 것에 하얀색을 좀 더 섞어 연해진 듯한 분홍빛이다.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눈을 마주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시작인건가요오?"
"그래. 시험할 거야."
"이미 결론이 난 건 아니구?"
"혹시 모르지."
남자는 여전히 창문에 걸터앉아있는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먹구름이 몰려오니 다소 강한 바람이 불어왔고, 여자의 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위험하니 잡고 내려오라는 제스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서 몸을 뒤로 뉘었다. 창밖으로 기우는 상체. 이미 몸의 균형이 기울었으니 그대로 남자가 손을 놓으면 추락할 것이다. 길목에서는 떨어지는 것 아니냐며 술렁대는 소리가 들렸고,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 여자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여자의 팔을 잡은 채, 조심스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위험하잖아. 로제."
"난 떨어져도 죽지 않는데?"
그리 말하면서도 여자는 기꺼이 창에서 내려와 낡은 나무 바닥을 밟았다. 여자의 말대로 여자는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을 것이다. 머리부터 떨어져 목이 꺾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되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쾌하게 웃었을 것이다. 남자가 그대로 손을 놓거나, 놓쳤다면 그대로 떨어져 그를 증명할 수도 있었다. 사실 여자는 그것을 노렸다. 그대로 떨어졌다면 바깥에서 술렁이던 인간들의 걱정과 비명이 뒤엉킬 것이었고, 자신이 그대로 일어난다면 안도보단 공포에 휩싸인 소리가 이 거리에 가득했을 테니까.
"인간들은 그렇지 않지. 네 모습을 보고 놀랄 거야."
"하핫! 그리 들으니 굉장히 너그러운 신 같답니다아?"
"나 정도면 너그러운 신이지. 안 그래?"
남자의 말에 로제라 불리운 여자는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겠다는 반응. 그 반응에 남자 역시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자신의 생각에 크게 반할 수 없다. 자신을 꼭 닮은 존재. 그러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여자는 그의 행동이 너그럽다 못해 자비롭다고도 생각했다. 저 소란스러운 것들을 그대로 없애버리지 않고 시험이라는 기회를 주니 어찌 자비롭지 않은가. 자신이 그였다면 분명 두려움에 질린 모습만을 즐기고 그대로 없애버렸을 것이다. 남자는 테이블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여자가 그를 따라 의자를 당기니 남자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씩 시작할 거야. 내일은 벌레가 들끓겠지."
"그럼 인간들이 병들 테고?"
"며칠 뒤에 구경이나 갈까. 포도주를 마실 잔을 새로 사야겠어."
문 너머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창 너머로 떨어질 것 같았던 여자를 걱정해 올라온 사람들일 것이다. 떨어지지 않고 무탈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그냥 넘어가도 좋았으련만, 문 앞에 있는 이들은 그 친절이 문제였다. 살아가는 것에 있어 친절함은 분명히 필요한 덕목일 것이나 그 친절을 베풀 상대가 틀렸다. 하필이면 그들이 걱정하고 있는 이는 인간들의 그런 친절함을 짓밟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남자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황금색 잔이 올려져 있었던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재밌을 거야. 분명."
끼익 소리를 내며 낡은 나무 문은 다시 열렸다. 문 앞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서 여자를 마주한다. 걱정, 불안이 안도의 빛으로 바뀌고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목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동시에 손을 뻗으니 그 자리에는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무언가 검게 그을린 자국만 남을 뿐이다. 흔적을 더 남기기엔 신의 계획이 흐트러지니, 고작 인간 따위가 흐트릴 수 없도록 지워 버린다.
***
갓 따왔다는 야채나 신선한 야채나 육류 등을 논하며 시끄러워야 할 거리는 다른 의미로 부산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물은 붉게 변하니 식수가 부족했고, 득달같이 날아들었던 벌레들은 많은 식생을 병들게 했다. 어디 그뿐이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니 살려달라는 고통의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기르던 가축들은 온통 겁에 질려 그 무엇도 하려고 들지 않았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이들은 눈이 붉게 변한 짐승들의 공격을 받기 십상이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런 남자의 팔에 여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을 엮었다. 남자의 붉은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했고, 여자는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오늘의 외출이 퍽 들떴던 모양이다.
"오늘은 더 안 하나요오?"
"해야지."
여자가 재촉이라도 하듯 물어오자 남자는 가벼이 하늘을 향해 손짓한다. 한차례 먹구름이 몰려왔던 이후, 흐리기만 하던 하늘의 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모래바람은 하늘로 치솟고 태양의 빛을 가리니 어둠만이 이 땅 아래의 모든 것을 반길 것이다.
구두 굽 소리가 거리를 가로지른다. 두 사람의 발소리에 달리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다. 죽음이 드리우기 시작한 마을에는 다른 존재에게 시선을 둘 여유란 없었다. 남자는 가판대에 놓여있는 물품들 사이에서 포도주잔을 찾아냈다. 고운 빛깔의 천도, 빛나는 보석이 달린 장신구도,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접시도 그저 사치품에 불과하니 지금의 사람들에겐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 물건들이다.
"잔은 이만하면 될 것 같고."
남자는 포도주잔을 챙겨 코트의 안쪽으로 넣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한 잔의 형태. 그것을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의 누군가가 보았다면 마술이라며 흥미로워했을 것이고, 그리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남자와 여자는 마술 따위라고 생각한 인간을 비웃었을 것이다. 아공간에 잔을 넣은 남자는 자신의 팔이 빈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팔에 자신의 팔을 엮고서 조잘대던 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안하진 않았다. 여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 그러니 어디에 있든, 그 존재는 자신이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감각을 따라 남자가 걸음을 옮기면 여자는 어느 골목의 입구에 서 있다.
곡식을 담아두었던 것 같은 종이봉투는 찢어졌고, 곡식을 비롯한 음식들이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둘. 한 사람의 얼굴이나 팔에는 베인 상처가 난무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 가슴팍에는 칼의 손잡이가 보이니 분명 깊숙하게 찔린 것이다. 찌른 것으로 보이는 이 역시 여기저기 베인 상처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팔로 여자를 향해 기어 오는 꼴을 보면 말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이여."
"아니지, 로제군. 다른 이름이 있잖아."
"라비이?"
"그래."
여자 역시도 남자가 지척까지 다가옴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만들어낸 존재의 기운이 다가옴을 모를 턱이 없다. 그와 함께 있노라면 자신의 안에 있는 힘이 더욱 방대하게 느껴지곤 했으니. 여자는 남자를 향해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더러운 것을 좀 치워도 되나요오? 그 힘의 사용에 대한 허락을 구하니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그를 허락한다.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가 온 곳으로 먼저 가있을게. 여자는 몸을 돌리는 것을 보며 다시 자신을 향해 기어 오고 있는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발치까지 기어 온 이는 분명히 여자가 남자를 신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 그 얼굴은 황홀감으로 젖어 있었다.
"신의 사자...저희를 구원..."
"아하핫!"
신의 사자라 말하는 이를 보며 여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의 사자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인간들이 말하는 그 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존재, 그 신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어느 힘을 일부 응축시켜 만들어낸 자. 그러니 신의 뜻을 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들이 말하는 구원일까. 피에 젖은 손이 검은 치맛단을 향해 뻗어오자 여자는 우는 아이를 바라봤다.
"거기 꼬마. 당장 눈, 감으랍니다."
이는 권유가 아니다.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의 눈은 절로 감겼으며, 동시에 여자는 구둣발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을 짓밟았다. 뾰족한 무언가가 뼈를 으스러뜨리는 감각에 비명과 함께 원망 어린 시선이 위로 향한다. 여자는 이런 눈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싫어했다. 주제넘게 어디서 그렇게 신의 사자를 쳐다보라고 했지요? 다시 한번, 구두 굽이 그 손을 짓밟음과 동시에 손을 뻗었던 그 남자는 손부터 서서히 검게 변하며 부서져 간다.
"직접 심판을 받은 것에 감사하랍니다."
여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을 벗어났다. 눈을 감았던 아이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남은 시신이야 곧 마을로 밀고 들어올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니 직접 치워줄 필요도 없다. 그저 먼저 걸음을 옮긴 남자의 뒤를 따를 뿐.
***
전지전능하신 신이여. 신을 부르는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금빛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금이 간 대리석 위로 쏟아진다. 하늘 아래 그 은혜를 널리 베푸사, 거룩하신 지혜로 날 이끄시고. 그 머리가 조아려진 곳에는 제단과 석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미천한 백성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지붕은 곳곳이 무너져 그저 새하얀 기둥만이 그 터를 보존하고 있는 신전. 한 기둥 위에 서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그 석상과 퍽 닮아 있다. 남자의 붉은 머플러가 흐린 하늘 위로 흩날렸다.
"가엾어라. 시험에 들게 한 이가 자신의 신인줄도 모르고."
어느새, 돌아온 여자는 남자의 등에 업히기라도 하듯 그의 어깨에 두 팔을 둘렀다. 긴 치맛자락 역시 그의 머플러처럼 흩날렸고, 몸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니 남자는 슬 자신의 피조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감을 알았다. 없애고 싶을 테지. 파괴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그리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고 있노라 매달리며 보채는 것이다.
"아까 그것들은?"
"급하니 빼앗은 것이지요. 그러다 싸움이 벌어졌고, 죽었고."
"그렇군."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내재된 본능을 보이기 마련이다. 라비기노사, 즉 인간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자는 그것을 알고 시험한 것이다. 생존이 달린 상황에서 인간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그에 그의 힘을 담은 그릇, 그 피조물은 말한 적이 있다. 이미 결론은 나지 않았느냐고. 그의 말대로 이 시험의 결론은 이미 나 있는 셈이었다. 그들이 이 세계에 내려온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남자는 포도주잔을 꺼냈다. 먼저 꺼낸 한 잔의 잔은 자신에게 매달려있는 여자에게로 내밀었으니 여자는 이내 목을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 남자의 팔에 엮었다. 이어 빈손으론 그 잔을 받으니, 다시 빈 남자의 손에는 다른 한 잔의 잔이 들린다. 그리고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붉은 액체. 그 액체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엔 미소가 만개한다. 이는 신의 피일지니, 그 그릇에겐 힘이오. 인간에겐 재앙이라.
"내 그들의 죄를 물을지니."
신과 그 사자의 손에 들린 두 잔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부딪힌다. 잔에 든 액체는 파도가 치듯 흔들렸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주 부드럽고도 나긋한 목소리로 명한다.
"모든 인간을 멸하라."
"모든 인간을 멸하라."
여자는 그의 입에서 들려올 명령을, 허락을 기다렸다. 그것만을 기다리며 살아온 존재. 신이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 당기는 방아쇠. 신의 음성에 사자의 음성이 겹쳐졌다. 잔을 비운 여자는 잔을 지면으로 떨어뜨린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잔은 깨져 파편만이 바닥 위를 뒹굴었다. 그 소리에 까마귀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니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검더라.
신이 마시던 잔을 기울여 기도를 올리던 신자 위로 액체를 떨어뜨리니 신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다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이어 신의 사자가 지면에 발을 딛으니 죽음의 꽃이 핀다. 그 향기는 짙고 짙어 여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모든 땅을 뒤덮기 시작하니 절망, 슬픔,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목소리들은 모두 검은 꽃잎이 흩날리듯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이는 재앙의 신의 도래이자 신의 심판.
멸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