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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12. 31.

Now
1900. 02. 15.
Stellar Record

04
데스테
멸망한 세계
발데르 A. 제로크, 아스테 D. 제로크
퓨, 망계
타닥. 불꽃이 일었다. 벽난로에 피어오른 불씨는 그 안을 채우는 장작을 집어삼키니 딱. 장작은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진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맞은 편에 놓인 소파에 앉은 남자가 신문을 넘기는 소리다. 불씨를 닮은 붉은 시선이 남자에게 닿기 시작하면 남자는 읽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 협탁 위에 올려둔다.
"사람이 사라졌다는군."
남자는 자신에게 닿았던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눈을 지닌 여인이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남자는 입을 열었다. 그는 곧 여인이 무엇이라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사실 남자는 여자가 거실로 다가오는 기척부터 알고 있었다. 거실 마루를 밟는 발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신고 있던 부드러운 실내용 신 덕분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해야 옳다. 그러니 이는 남자의 여자를 향한 집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의 답변도 그러했다. 여자가 거실로 들어서면 자신의 모습이 보일 테니, 그러니 눈에 띄는 기사가 있느냐 물어왔을 것이다. 그가 번거롭지 않도록 먼저 답을 내려두는 것.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그를 위한 행동 중 하나였다.
"경관들이 바빠지겠네."
여자는 안타까움이 묻은 목소리로 말하며 남자의 옆에 앉았다. 여자는 갓 내린 커피잔을 남자의 앞에 내려두었다. 남자의 시선은 내려둔 두 잔으로 향한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자신의 잔에 비해, 투명한 잔에 담긴 하나의 잔의 표면에는 송골송골 물이 맺혔다.
"같은 것으로 하지 않고."
"날이 추우니까 델은 따뜻한 걸 주고 싶어서."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나 보지."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부드러이 웃었다. 남들이 듣기에는 다소 퉁명스러운 말일지 모르나, 그의 말에는 애정이 묻어 있음을 알았다. 델은 여자가 자신의 남편인 발데르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부르는 존재인 만큼 그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았고, 익숙해져 왔다. 바꿔줄까? 발데르의 시선은 여자, 그러니 자신의 부인인 아스테에게로 향한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천천히 감겼다 다시 떠오른다.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소가 떠오르고, 발데르는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들었다.
"네가 좋아서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면 바꿨을 거야."
"알아. 델은 늘 나한테 좋은 것을 양보하려고 하니까."
남자가 잔을 기울였다. 검고 뜨거운 액체를 한 모금 머금고 나면 따뜻한 기운이 몸 안으로 퍼지는 기분과 함께 몸을 누르고 있던 피로감이 조금 걷힌다. 발데르의 어깨에 아스테가 살포시 기대오자 그 손에 들렸던 커피의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스테가 기대어 오면 발데르는 탁자 위에 마시던 잔을 내리고, 다시 신문을 펼쳤다. 커피가 식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니 읽던 신문을 마저 읽을 요량이었다. 아스테 역시 그 실종 소식이 궁금했으니 이렇게 기대 온 것이리라. 신문에 적힌 내용은 별다른 것 없었다. 일을 하러 갔던 이가, 잠시 물건을 사러 갔던 이가, 친구네 집에 갔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 찾고 있다는 내용. 그리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인적 사항과 그 가족들의 연락처. 다만 평소보다 그 인원이 조금 많나 싶었을 뿐이다.
"찾을 수 있을까?"
"운이 좋다면."
발데르의 음성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아스테의 이름을 부를 때의 온기는 찾아볼 수 없다. 아스테의 물음이나 타인에 대한 이야기라 더욱 그러했다. 애초에 발데르가 신문을 읽는 것은 그저 경제적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고, 실종된 이들에 대한 공고는 우연히 그의 눈에 띄었을 뿐이다. 아스테 역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건조한 음성에 서운함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일이라면 저 음성은 벽난로에서 타오르고 있는 저 불꽃보다 따뜻하고, 뜨거울 테니까.
"있지, 델."
발데르는 다시금 신문을 접었다. 푸른 시선이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여인에게로 향하니 듣고 있다는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스테 역시 종이가 접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렇게 있는 거 좋다."
"그렇다면 며칠 휴가를 내야겠군."
발데르의 대답에 아스테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델이 휴가를 내도 내가 못 낼지도 몰라.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걸. 아스테는 그리 말하며 조심스레 발데르의 손을 잡았다. 크고 거칠었다. 이 순간 아스테가 발데르의 손을 잡은 것엔 이유가 있었다. 승인하지 않으면 다 없애버리면 되겠군. 그러면 반대할 이가 사라지지 않나. 발데르의 목소리에 아스테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결국 웃음이 새어 나온 탓이다. 자신의 남편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에겐 한없이 부드러우나,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거칠고 가차 없는 사람. 손을 붙잡은 이유는 그가 그런 말을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만류하기 위함이었다. 부드러운 손이 그 거친 손을 두어 번 다독였다.
***
발데르의 일과 중 하나는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몸에 배버린 습관과도 같은 것. 신문을 읽는 것은 결국 업무와도 직결되는 것이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래의 발간된 신문은 앞서 발간되었던 신문들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신문사에 따라 다르나 사회적 이슈, 경제적 동태, 더 나아가 유명 인사들의 가십거리들이 주를 이루던 신문들의 상당수가 실종자를 찾는다는 내용의 기사들로 점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이상했다. 신문의 짜투리를 차지하던 것이 한 면의 반을 차지하다가, 신문의 가장 앞면을 시작으로 하여 그 신문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상황인가. 신문 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입에서 빈번하게 들려오는 것이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이상했다.
발데르는 직원들에게 퇴근을 권했다. 더불어 한동안 집에서 쉬라는 말과 함께 자신 역시 사무실을 벗어났다. 아스테가 자신을 두고 어딘가로 가버릴 이유는 없다지만, 가급적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스친 탓이다. 아스테가 휴가를 내지 못한다면 그 출근길과 퇴근길을 동행할 요량이었다.
아스테의 직장 앞에 도착하니 몇몇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적절한 순간에 도착한 모양이었는지, 커다란 문을 밀고 나오는 이들 사이로 아스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아스테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 보이면 아스테도 발데르를 발견한 모양인지 환하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재촉하려고 했다. 아스테가 뗀 걸음은 한 걸음. 이내 그 걸음은 멈췄다.
발데르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던 이들이 증발이라도 하듯 사라져버린 탓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스테의 시선은 분주하게 주변을 훑었다. 없었다. 그 누구도. 퇴근 시간이라 붐벼야 했을 그 거리에 남은 존재라곤 자신과 발데르, 단둘뿐이라 붉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쳐 돌아가는군."
누구를 향한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이나 적어도 아스테를 향한 말은 아닐 것이다. 발데르는 한걸음에 아스테의 지척으로 다가와 아스테를 품에 안았다. 따스한 온기가 닿자 흔들리던 붉은 시선은 안정을 되찾는다. 발데르 역시 분명히 보았다. 아스테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오던 사람들, 그 뒤를 지나가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광경을.
아스테를 품에 안고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 발데르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스테가 발데르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발데르는 아스테에게 고했다. 이 도시를 떠나자고. 그 말에 아스테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어떤 사람도 마주할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도시에 남은 사람은 둘 뿐이라는 것을. 그러니 발데르가 떠나고자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아스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해왔으니까.
***
밤이 되어서야 그간 지내왔던 집의 문을 닫고 나섰다. 어둑한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아래로 새하얀 눈발이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맞잡은 손이 있었으니 차갑지 않았다. 길을 걷다 보니 길가에 세워져 있는 많은 마차가 보였다. 이렇게 서 있다가 부르는 이가 있다면 그들을 태워주고 삯을 받는 것이 마부들의 생계 수단. 그러나 텅 빈 거리에는 태울 손님을 잃은 마차에 마부를 잃은 말들만이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발데르가 가장 큰 마차의 문을 열자 아스테는 그 안으로 오른다.
"델. 말들 풀어주고 가면 안 돼?"
아스테의 말에 짐가방 역시 마차에 싣던 발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묶어둔다면 결국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이들을 기다리다 죽어갈 것이 자명했다. 차가운 바람이 들새라 마차의 문을 닫은 발데르는 인근을 거닐며 자신들이 타고 갈 마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마차에 메인 말들을 풀었다. 이내 아스테가 탄 마차를 이끌 말의 고삐를 쥐었다.
얼마나 내달렸을까. 인근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탄 마차는 멈춰 섰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마구간으로 향하니 역시 그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달려오느라 지친 말에게 여물을 챙겨준 뒤, 발데르와 아스테는 천천히 그 마을을 거닐었다. 그러나 그 마을 역시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을 반기는 것은 그저 골목을 거닐던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동물 뿐이었다.
"정말 우리 빼고 모두가 사라진 것만 같아."
"우린 운이 좋았나 보군."
그리 말하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떠오른 의문이 한 가지. 모두가 사라졌다면 왜 두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물론 사라지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게 되는 당연한 의문이다.
"왜 우리만 남았는지 알고 싶어."
"그가 중요한가?"
사실 발데르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스테가 자신을 두고 사라지지 않았고, 반대로 아스테만 홀로 두고 자신이 사라져버리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 족했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지내던 곳을 떠나온 이유도 혹여 그 마을이 문제였다면 아스테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염려되었던 것이 전부다. 그러니 아스테의 말에는 작은 의문만을 더한다.
"원인을 알면 나도, 델도 사라지지 않을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스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유를 안다면 그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방지할 수 있을 터다. 발데르는 아스테의 옆에서 걸었다. 아스테가 다른 이들의 흔적을 쫓아 거리를 걷고, 비어있는 가게에 들어서고, 또 다른 마을로 향할 때도 항상. 그렇게 두 사람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얽매인 동물들을 발견하면 그들에게 어디로든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고,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남겨둔 것들을 이용했다. 들리는 마을마다 그 마을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도시와 관련된 지도를 구했고, 가지고 온 양장 노트에는 두 사람의 이동 경로와 일과를 적어 내려갔다.
추운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직접 재료를 구하진 못하더라도 구비되어 있는 것들이 쉬이 상하지는 않았으니 비어있는 가게에 들어가 식사하고, 식재료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추위는 가까운 성당, 혹은 아무 문이나 열면 빈집이 난무했으니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들의 흔적이 남지 않은 도시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갔다.
"내일은 이쪽으로 가볼까?"
"여기 말인가? 그것도 괜찮겠군."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군."
그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쌓이는 것은 두 사람의 것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그는 발데르가 알았고, 아스테 역시 알았다. 다만, 아스테가 그를 원하니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하니 그도 좋겠다 생각할 뿐이다. 이 세계는 멸망했다고 보아야 옳은가. 발데르는 품에 안겨 잠든 아스테에게 제 망토를 덮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자신들과 동물들뿐이다. 그래, 인류가 멸망한 것이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그럼에도 참담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발데르는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제 부인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발데르는 아스테가 기록하던 것들을 눈으로 훑었다. 무수히 많은 기록이 쌓였다. 존재했으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록. 그를 보고 있노라니 갑작스러운 이 멸망과도 같은 상황에 제 부인을 던져둔 것만 같아 불쾌한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아스테가 어떤 길을 걷든 함께 할 것이나, 그 끝에 절망만 없길 바랐다. 그러니 그는 세계에 고한다.
― 세계여, 우리를 최후의 인류로 남기도록 하라. 우리는 이 차디찬 겨울을 굳건하게 버티고, 또 기억할 테니.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빛이 될 터이니 최초의 인류로 기억하라. 이 세계는 나에게서 그를 빼앗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를 빼앗지 못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