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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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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02. 22.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떤 재난에 대하여

03
콴유아
멸망한 세계
레온 콴런, 천유아
콴: @BB0NGDDA / 유아: @molomission
류월, 캡슐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 천유아는 그런 것들을 싫어했다.
*
유아는 건물을 둘러싼 철창 너머로 이제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존재들의 배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공격성과 식인 본능만 남아 머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오래된 감염체가 도시 전체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꺼림직스럽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뇌까지 식물에 뒤덮인 덕에 시력이 나쁘고 지능이 낮아서 다행이었다.
대략 한 시간 전, 유아가 멀리 있는 건물 유리에 로프를 흡착시켜 연결한 후 고리에 마네킹을 매달아 미는 방법으로 침잠해 있던 도시 속에서 소음을 냈다. 간만에 생겨난 큰 소리에 사냥감이 도시로 들어온 것이라 판단한 건지, 그 근방의 감염체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상가로 뛰쳐나왔다. 주변 감염체의 포효를 듣고 또 연쇄반응으로 난리를 피우며 모인 감염체들은 곧 사냥감이 없음을 깨닫고 멈추었다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이 왜 여기에 서 있었는지도 잊은 듯 다른 건물의 위를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볕이 잘 드는 곳을 향해 새하얀 포자 가루를 뿌리며 서서히 흩어졌다.
‘끔찍한 꼴이네.’
그동안 그들의 시야를 피해 펜스로 둘러싸인 고층 건물로 올라간 유아는 비교적 깔끔한 방 하나를 잡아 너무 오랜 기간 양분을 섭취하지도 빛을 받지도 못해 말라 죽은 감염체의 시신을 멀리 치워버렸다. 그래도 인간의 얼굴 형태가 남은 덕에 끔찍한 농담 삼아서 식물인간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었겠지만, 시신에서는 오래된 사체의 냄새가 아닌 썩어 문드러진 나무의 냄새가 났기에 유아는 그걸 그냥 식물 취급하기로 하며 죽은 자에 대한 예우 없이 발로 걷어 찼다.
평소처럼 환기를 할 겸 창문을 열고, 짐을 풀고 방독면을 벗은 다음에 지도를 펼치지 않고 창밖을 본 건 언제나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이고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야 간신히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던 평소와 달리 너무 손쉽게 원하는 걸 얻어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어서였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다면 불이라도 지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었는데, 굶주린 짐승 같이 달려들던 감염체가 아니고 지성도 이성도 남아 있지 않은 느릿한 감염체만 있던 덕에 그간의 고생과 긴장을 비웃듯 일이 너무 쉬워져 버렸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도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가 뒤덮고 있었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을 타고 나무 덩굴과 이끼가 자리 잡고, 도로에 정리되지 않은 장난감처럼 나열된 차들 사이사이로 괴상한 소리를 내는 감염체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휴양도시로 유명했다던 샌디에고의 문명 위를 뒤덮어 다채로운 초록빛으로 빛나는 자연의 색채는 보는 이에게 경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친절히 알려주고 있었으나, 감염체의 몸에서 나오는 포자가 다른 식물의 생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정도는 상식처럼 알고 있던 유아로서는 마냥 그 풍경이 아름답다고 박수를 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건 죄다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파고들어 버린 정체불명인 포자의 최종 형태이자 그 부산물이니까.
‘콴도 저렇게 될 뻔했던 걸까.’
집중해서 기괴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뇌를 파먹고 세상을 보는 눈을 앗아가는 포자가 살아있는 인간만을 숙주로 삼는 바람에 온 지구가 인류의 관짝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그의 집이 사비를 털어 수많은 사람에게 제공한 쉘터는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허락받지 않으면 감염체는커녕 이성을 가진 인간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안전하고 견고한 성. 그리고 그런 쉘터의 지도자가 낳은 고명딸로서 제가 짊어진 책임만큼의 풍족한 삶을 살아온 그였다. 그건 그가 적어도 제가 먼저 부모를 손가락질한 다음 그들의 피실험자를 데리고 연구소 문밖을 나서지만 않았다면 580여 마일을 일주한 끝에 이런 풍경을 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그가 이런 상황에 면역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친 몸의 혈관을 타고 과거에 대한 최악의 가정이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하자 도시 풍경 속에 이상한 상상이 맺힌다. 그건 감염체로부터 자신을 떨어트리기 위해 저를 끌고 가는 사람들과,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체 하지 그랬냐는 듯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제 부모와, 감염되어 혈관이 올라오고 눈 한 쪽이 희뿌옇게 변하기 시작한 …. 이쯤에서 유아가 제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털어내려 마른세수를 했으나 한 번 머릿속에 재생된 영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존재가 멋대로 기존의 저를 해체했다가 몇몇 중요한 부품을 빠트린 채 재조립한 기분도. 쉘터 바깥으로 나가서 죽은 세상을 가로지를 결심을 했을 때부터 이런 모독적인 풍경을 마주할 거라는 사실은 예상한 일이었지만, 얻어맞을 부위를 안다고 아픔이 경감되진 않는 법이다.
살면서 유의미하게 거대한 감정의 변화를 느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내가 원한 풍경은 이런 게 아니었어.」
상념 사이로 이곳으로 오기 전, 산타 마리아와 월러 공원의 어딘가에 위치한 은신처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끼어들었다. 산 사람은 도망치고 죽은 자는 백골이 되어 먼지가 내려앉은 도시를 의인화한 것 같던 노인의 목소리는 끊길 듯 가냘팠으나 시간이 지나도 유아에게는 노인이 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지독히 우울하고 때로는 유쾌했으며 때로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멸망 속에서 미쳐버린 개인의 형상 같던 연약한 사람의 목소리는 쉽게 잊힐 만한 종류는 아니었던 탓이다.
*
유아가 만났던 노인은 사건의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회고록을 읽는 사람처럼 매끄럽게 샌디에고 바이오 클러스터의 어떤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일하던 자신의 과거를 밝혔다. 사막화 방지를 위해 식물의 생장을 도울 수 있는 포자를 뿜는 동충하초를 연구하고 있었다나. 다른 클러스터를 앞지르기 위한 관계자의 은근한 닦달이 내부의 조바심을 일으켜 멸망의 시초가 되었음 역시 시인했다. 그의 말 구석마다 어쩌면 막을 수 있었던 인재 사고에 대한 후회가 비쳤다.
앉은 채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도 덜덜 떨고 있는 손끝에서 알코올 중독의 여파와 그가 견뎌온 세월의 흔적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볼품없는 꼬락서니가 꺼려질 법도 한데 유아는 그의 노쇠한 몸과 그가 버텨온 사건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지도상 근처에 와인 전문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 술독을 독차지했을 지도 모르겠다 따위의 다른 생각이나 하는 중이었다. 샌디에고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여기에 발을 묶여 지낸 것은 신이 제게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대목은 니체와 이성의 궤를 일부 함께 하는 제 귀에는 좀 듣기 싫었지만, 자리를 떠날 정도는 아니었다. 깔끔하게 잘리지 못한 다리의 뭉툭한 단면이 노인이 입은 원피스 자락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던 탓이다.
믿지도 않는 유일신에 대한 찬양이 들릴 즈음엔 그가 부상당했을 때에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을 수준의 의료 시술 중 가장 올바른 길을 떠올리며, 그가 용케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중이었다. 할 일이 있기에.
그러나 숲 너머로 모스 부호를 보내는 일을 사명 삼아 생을 버텼다는 말이 불현듯 그를 현실로 끌어왔다.
“… 그렇습니까.”
대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아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원망도 가당찮은 동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세상이 멸망하고 좀 지나서 태어난 사람이어서일지도 몰랐고, 운이 좋아 그 안에서 그다지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바이오 산업이 뭔지도 모르고 닦달한 관계자나 제 친조부의 초기 요청을 경시한 결과로 몰락해 버린 연방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탓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릴 사람이라는 점과,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빠르게 포기하게 만든 어린 나날이 가장 커다란 사유였을 지도 몰랐다.
그가 믿는 신이 정말 존재하건 우연이건, 노인은 운이 좋았다. 그가 평생 사명 삼아 숲 밖으로 보낸 기도가 닿아 응답한 사람이 천유아였으니까. 그는 자애로운 사람도 긴 시간을 거친 일을 숭고하다며 쉽게 감동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후회하고 책임을 지려는 타인에게 돌을 던지고 불태우는 인간군상에 속하지는 않았다. 어린 영혼에 새겨진 서러움과 같던 열망 역시 단순히 부모와 연결되었을 뿐이었기에, 멸망도 번영도 필요 없는 종류인 자였다. 그 덕택에 노인이 가지지도 못한 것을 잃은 자의 눈먼 분노에 맞아 죽는 일은 면했다.
“그럼, 어떠한 것을 원하셨기에.”
그를 타자로 규명한 천유아는 다만 노인에게 순수한 의문을 품을 뿐이다. 자신이 알지 못한 어느 시간 속에서 여행자의 북극성처럼 자신을 이끌어줄 지성과 회양목 안의 불같은 열정을 가진 연구원들이 바라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제 나이보다 많은 시간 동안 죽어가는 몸을 부여잡고 응답 없이 말려 죽일 기도에 매달리도록 만든 책임감에 대해.
“아이들이 좀 더 웃을 수 있는 세상이었지.”
“….”
“그런데….”
매끄럽게 제 과거를 들추던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은신처 바깥의 창을 바라보았다. 우악스럽게 세워진 펜스와 그를 막은 여러 구조물로 사이 나누어진 세계 바깥에 잔뜩 흐트러진 숲이 낙엽 향기에 몇 번 흔들릴 동안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독으로 써 내렸던 회고 바깥의 질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려는 게 아니고, 제가 살아온 족적과 그에 따른 향수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때 영광을 누리던 과학자가 깊은 황금빛 물살을 거슬러 과거를 떠올리는 모습은 천유아에게 거북했다. 단순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닥치는 대로 해대는 스무 살 애송이에겐 그가 가졌던 열정도, 그렇게 연소하여 찬란하게 추락한 과거도 없는 탓이리라. 그 탓인지 부모님에게 했던 대로 ‘멸망 이전의 자만을 못 잊은 미국인 같은 발상이로군요.’ 같은 말로 냉소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죄책감에 짓눌려 죽지 않고 버텨온 이에게 할 말은 아니기에.
‘유아, 말하기 좀 그러면 내가 말할까….’
시간을 분보다는 시간 단위로 세는 게 낫다고 생각할 즈음, 둘의 담화 자리에 같이 앉아 있던 일행이 유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를 알고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천유아는 한결같이 공적인 일에 제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그는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분 단위의 스케줄을 짜서 뭐든 해내는 아이였고 연구소 안에서의 그는 용무를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자신들을 습격한 생존자 무리를 잡아 모았을 때 가감 없이 결정권자의 허벅지를 쏘던 유아가 생생했다. 출혈이 심해져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할 때까지 악다구니 지르는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자기 할 일을 하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삶을 구걸하자 차가운 목소리로 ‘바쁘니까 시간 낭비 말고 본론이나 말해’라고 말하던 제 어린 은인의 모습은 그의 심화판이고. 그때 유아가 망설임 없이 쏜 이도 꽤 나이가 있어 보였기에 노인 쪽이 걱정이 되기 시작한 듯했다.
‘아니, 콴. 기다리자.’
‘괜찮겠어요?’
처음엔 노인만을 바라보던 유아도 볼 위로 엉겨 붙는 시선의 농도가 짙어지자 차마 그를 계속 무시할 수 없었다. 명백하게 제 심기가 건드려지지 않았나 살피는 모습에 유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짤막하게 저어 보였다. 레온 콴런은, 그러니까 콴이라 불린 일행은 제가 모시는 상사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자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부조화를 느끼고 있는 자의 표정이 배어 나왔다. 솔직히 그는 유아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백신을 만들러 떠나겠으니 연구소 약도와 비밀번호나 어서 내놓으라고 노인에게 으름장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못해도 좀 더 짜증을 내거나, 내심 미뤄진 일정에 조바심을 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단칼에 내려진 자비에 벙찐 콴은 이내 볼을 긁적이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콴은 유아의 대답에 마음이 편해진 건지 어른들의 불편한 대화에 낀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고 한결 편한 표정으로 구경하듯 조용히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유아가 가끔 제게 닿는 콴의 웃음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침묵을 유지하기를 또 한참, 끊겼던 노인의 말은 겨우 제가 빼앗았으니 돌리도록 도와달라는 말로 방점을 찍었다. 따뜻한 물로 목욕할 기회와 샌디에고의 한 건물 사이 그들이 종이로 백업해둔 문서가 잠든 금고의 약도와 비밀번호를 받으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중간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
공원 속의 은신처에서 나와 산타 마리아의 학교에서 하루를 보낸 뒤 샌디에고로 향한 이후로는 고행길이었다. 이미 케틀맨 시티에서부터 생존자들과 난전을 벌이고 차를 버린 이후 거기서부터 은신처까지도 걸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지만, 진원지에 가까워질수록 감염체들의 수도 억센 방법으로 살아온 생존자의 수도 점점 더 늘어난 탓이 컸다.
당장 여기에 당도하기 이틀 전에도 생존자들의 악질적인 트랩에 발목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밀려드는 감염체를 처리하느라 생사의 경계로 고무줄놀이를 하다 왔던 몸이다. 처음 사람을 쏜 이래로 지금까지도 쉘터를 박차고 나온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지만, 체력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 그대로 목숨을 책임질 일행이 있었기에 단 한 번도 내색은 않았으나 여기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저것들 때문에, 인간들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인간들과 마찰을 빚다가 들이닥친 감염체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곤경을 겪었는지 생각하는 일도 힘들 정도로 유아는 지쳐 있었다.
‘…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 천유아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일을 오래토록 걱정하여 저를 깎아 먹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방금까지 생생하게 보았던 영상도 피곤하니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는 게 아니겠냐며 잡생각으로 치부해버린 그는 눈두덩을 몇 번 꾹꾹 누른 그가 방금의 멍청한 생각과 회상에 온갖 반박을 내놓는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이나마 흔들렸던 저를 비웃기에 성공하자 그제야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애초에 무언가 있었어야 잃고 잃어야 그리움을 느끼는 거다. 향수도 우울함도 가진 적 없는 사람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실존하지도 않는 상실에 습관적인 우울로 잡혀먹히는 건 볼썽사나운 일이다. 유아는 지금 당장 할 일을 하기도 바쁜 사람이었다. 복기 끝에 사람들이 알고 있을 무감한 낯으로 변해 천천히 뒤돌자, 한참 전부터 그의 뒤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콴이 그제야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다.
“유아.”
구태여 상대를 부르지 않고 그가 먼저 돌아보길 기다린 건지 일말의 반가움이 묻어나는 얼굴에 얼음을 다듬어 만든 것 같은 유아의 표정에도 일순 작은 일렁임이 생겼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하게 침묵으로 저를 부른 용건을 재촉하자 단순히 누가 뒤에 있어 놀랐던 것으로 여긴 건지 조금 미안한 낯으로 음성이 이어진다.
“주변은 다 봐 뒀어…. 그냥 여기서 자도 될 것 같아서요.”
“그래, 수고했어.”
“별것도 아닌걸….”
일상적인 치하에 대단한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쑥스럽게 웃는 낯에 결국 유아가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유아가 뜬금없이 식물에 가까워진 거라면 낮에는 광합성 덕분에 더 활발한 것일 테니 휴식을 취했다가 밤이 되면 움직이자며 문으로 다가가 먼저 바리케이드를 치는 통에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개처럼 얌전히 고개를 기울이던 콴도 이런 일은 제가 하겠으니 발목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쉬라며 그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괜찮으니 오늘 팔자에도 없던 마네킹 구하느라 쭉 쪼그리고 다닌 너나 쉬라며 등을 밀어 쫓아내자 ‘하지만’, ‘그래도’ 따위의 소리를 고유한 울음소리처럼 내던 콴이 유아가 눈에 힘을 주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다 큰 성인이 제가 인상 한 번 썼다고 풀죽은 표정으로 이미 거의 준비가 끝난 잠자리를 다시 정리하고 있는 걸 훔쳐보자니 제법 미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함께 붙어있는 시간을 줄이는 게 답이라고 결론지었으니 그를 따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제가 함부로 마음을 방패 삼아 들이대어 앞으로도 불편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낫겠거니 하며 단단히 입구를 봉해 둔다.
‘적어도 나는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까.’
콴은 연구소에서 거의 유일한 유아의 또래였다. 쉘터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비상한 머리를 사유로 연구소로 데려와졌던 콴은 연구원들의 공동 육아를 전제로 생활했으나 대부분 짐덩이 취급을 받고 자랐더랬다. 분명 살아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있음에도 제 부모의 손을 거의 타지 못한 건 유아도 마찬가지였기에 두 어린 영혼은 놓고 보면 비슷한 부분이 보이기도 했다. 부모의 지위와 더불어 최연소 연구원 타이틀까지 달아 늘 기세등등하게 싫은 건 싫다, 불합리한 일은 불합리하다 따져 드는 유아와 달리 콴은 그의 용모에 끌려서 누가 냅다 입을 맞추건, 연애 놀음을 운운하며 데리고 놀다 버리건, 상사가 그를 하대하며 온갖 잡일을 맡기건 모두 ‘괜찮다’고 하는 무른 성격이었지만, 그 덕인지 둘은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나이는 유아 쪽이 세 살 어렸지만 그는 쉘터 내에서 콴의 거의 유일한 보호자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처우 개선을 가장 먼저 주장하며 당시의 연구원들에게 대들던 것은 열세 살의 유아였고, 그에게 온갖 잡무를 맡기는 사람들을 잡아내 징계하는 것은 열여섯 살의 유아였으며, 이외의 그가 당하는 불합리한 일에도 그보다 더 화내며 전면에 나서는 것도 전부 유아였다. 백신에 대한 힌트가 담긴 구조 신호를 오랜 세월 무시한 것을 알게 되어 부모에게 따지러 왔던 날, 콴에게 사제 백신을 투여하려던 그들의 손을 쳐내고 그 자리에 있던 콴을 데리고 나간 게 유아라는 사실은 그걸 알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제가 백신을 구해 오면 이딴 일은 그만 두라며 쉘터 밖을 나간 유아를 따라 콴도 쉘터 밖으로 나온 것은 더더욱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 책임진 사람은 끝까지 책임져야지.’
유아는 옳지 않은 일에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지만 언제나 제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갈피를 못 잡고 눈치를 보며 위축된 영혼의 편을 든 것도 그이니 그가 제 몫을 찾아 ‘싫어요’를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항상성 있게 옆에 붙어 있는 게 제가 시작한 일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그러기를 칠 년, 또 무슨 일을 당하는 건 아닌지 자꾸 시선으로 쫓다 보니 조금씩 그가 마음을 비집고 자리 잡아 버린 건 일종의 재난이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축복이라 여기겠지만,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사람이 만든 기준이며 벽을 손쓸 틈도 없이 부순다는 관점에서 그에게 재난과 사랑은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아는 그가 싹튼 마음을 죽이는 법을 알아내기를 바랐다. 오래된 보살핌의 끝에 후원자와 결혼하는 결말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싶어 그를 도운 게 아니었던 탓이다. 불손한 마음이 그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던 도중 콴이 채 지우지 못한 붉은 안료가 인주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날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도망쳤던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콴은 풀지 못할 어려운 문제로 등극했다. 그건 저 물렁한 사람은 제가 고백을 하건 옆에 있어 달라고 하건 그것도 ‘괜찮다’라고 할 텐데 그렇게 되면 제가 평생 그를 위해 맞서던 부조리한 인간들과 자신이 다를 바가 없어지지 않는가 따위의, 일어날 리 없는 일에 대한 것들이었다.
*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몸을 움직이기 버거워진 건지 간헐적으로 균형을 잃고 감염체가 철창에 몸을 치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도시 속에서 감염체들과는 별개의 삶을 살아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야생동물들의 소리 역시 심심찮게 들렸다. 모두 그가 떠나온 쉘터에서는 들을 수 없던 것이었다.
안전이 확보되자 불필요하게 불침번을 설 필요가 없어져 함께 몸을 누인 좁은 방 안에는 쓸데없이 달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유아의 강한 주장으로 최대한 거리를 두고 눕자,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많이 피곤했던 건지 콴이 먼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유아는 여태 눈을 뜬 채였다. 지친 몸이 체감하는 중력은 이러다 땅 밑으로 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상대의 숨이 일정해질 즈음 유아는 고개만 조금 돌려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열여섯 살의 소년이 스물셋의 청년이 되어가는 변화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왔지만, 눈을 뜬 모습과 눈을 감은 모습 사이의 차이를 알게 된 건 상당히 최근인 탓에 기분이 미묘했다. 연구소 중에서 그에게 은근히 치근덕대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쌩하니 무시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지. 자신이 생각한 관계가 맞았다면, 그 사람들도 이 차이를 알았을까. 미묘한 독점욕과 질투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유아는 상대가 한참을 미동 없이 잠들어 있자 용기가 생긴 건지 조금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달빛이 환한 덕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잘 보여서 조금은 기쁜 날이었다. 웃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상대가 자기를 보고 자주 웃어주는 것 가지고 제가 뭐라도 된 줄 알지 말라며 납덩이 같은 마음을 감정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는 그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는 지금이 편했다. 알아서 잘 굴러갈 딸에게는 시선 줄 새도 없이 바쁜 제 부모로부터 파생된 평생의 버릇이었다. 콴이 약은 사람이었으면, 그래서 자기를 조금이라도 챙길 줄 알았다면 지금처럼 제게 시선도 안 줄 텐데. 그럼 편하게 바라만 봤을 텐데. 유아는 처음 그의 무던함을 원망했다.
“유아, 잠이 안 와요?”
“… 일정에는 무리 안 가게 할게.”
별달리 뒤척이지도 않았는데 제 기척을 알아챈 건지 콴이 졸음 섞인 목소리로 유아를 넌지시 불렀다. 상대가 잠든 틈을 타 음험하게 훔쳐본 게 부끄러운 탓에 뭉툭한 말투로 말한 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누웠다. 꼭 무언가에 홀린 듯 잠시나마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심장 박동을 갈무리하는 사이,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 행동이 불쾌해서 떠나려는 건 아닌가 싶어 사과부터 하려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키자, 콴이 제 몫의 침구를 정리해서 유아의 곁으로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 상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벙찐 채 고장이 난 사이 콴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아의 옆자리에 다시 모포를 깐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누워 어정쩡하게 상체를 일으킨 상태의 유아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퍽 비현실적이었다. 이미 거리를 벌리기 위해 벽에 붙어 있다시피 하던 그로서는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뭐 해?”
“그게… 심장 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온대서.”
“…… 누가.”
“… 그게, 주임 연구원님이…?”
터무니없는 말에 유아는 맥이 탁 풀렸다. 제가 콴을 보려 뒤척인 게 진원지에서 이상한 소리에 둘러싸여 있자니 긴장이 되어서 잠이 안 와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온정을 베풀려는 모습에 넓은 연구소에서 그 말을 한 주임 연구원이 누구인지, 그게 콴에게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 캐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반쯤 일방적인 실랑이 끝에 같이 눕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유아가 어쩔 수 없는 척 몸을 뉘었다.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러지 말 걸.’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며낼 수 있는 건 표정과 목소리까지다. 유아는 그의 곁에 누운 후 지근거리에 붙은 게 제가 몇 년째 바라보던 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면 느껴질 수록 심장이 주체를 못 하고 뛰어대는 통에 그나마 있던 피로감도 달아나 잠이 오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달이 밝아서 얼굴이 잘 보여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머리카락이 가리지 못해 드러날 살갗의 색이 어떨지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죽고 싶었다. 허리를 넘겼던 머리를 아무렇게나 짧게 자를 때 모두가 탄식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지금만큼은 제 풍성하고 길던 머리칼이 그리워졌다. 생전 않던 후회가 밀려올 만큼.
‘잠들면 다시 구석에 가서 잘까. 콴이 일어나면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다고 하고 불침번을 서도 될 것 같고, 아, 그렇게 되면 내일 이동할 거리를 조정해야…’
“있잖아요, 유아….”
뒤이어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살짝 과하게 고개 각도를 내린 채 어떻게 해야 제가 판 무덤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사이, 목덜미에 더운 숨이 내려앉는다.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몸을 빼자 인기척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쭈뼛 일어선 솜털 끝의 감각으로 입술이 느껴질 정도의 지근거리에 유아가 당황한 사이, 콴이 기어이 어깨를 붇잡고 짤막하게 흰 목에다 입술을 내리누른다.
목을 문 채 입술로 몇 번 여린 살갗을 우물거리는 게 느껴지자 심장을 토하는 게 차라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 그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쥔다. 단순히 눈앞에 있었기에 입을 대어 봤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콴이 웅얼거린다.
“나오면서, 거슬릴지도 모른다며 머리도 잘랐잖아….”
“… 그게 왜?”
“유아가 날 위해 늘 노력해주니까, 나도 유아에게 좋은 걸 주고 싶은데,”
모두 알다시피, 유아는 다 갖고 있잖아요….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안은 채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나긋하게 뇌에 꽂히는 말에 눈이 핑핑 돌았다. 그가 뒤통수에 이마를 갖다 대며 부비는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으나 꿈이면 깨고 싶지 않고 현실이라면 착각이어도 좋으니 이 순간을 조금만 더 유지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뛰쳐나가고 싶은 본능과 꿈꾸지도 못한 상황에 뛰는 마음 사이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무작정 숨을 참은 유아가 뒷말을 기다린다. 대답이 없으나 정말 싫다면 뺨이라도 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가 밀어내는 기색이 아니자 콴이 조금 자신감을 얻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마저 묻는다.
“그래서 그런데 나한테 바라는 건, 없어요?”
평온한 콴과 달리 이쯤에서 유아는 심장이 내려앉은 듯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에 콴이 피로에 절어 가물거리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재우는 아이처럼 조금씩 주절거린다. 쉘터에서부터 자신은 늘 속을 썩이고 걱정을 끼치기 일쑤인데 그럴 때마다 당신이 도와줬고, 이제는 목숨도 살려준 셈이니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에 그냥 조금 울고 싶어졌다. 그가 도망갈 수 없다는 듯 완전히, 그러나 다정하게 저를 끌어안고 무언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동안 그는 차라리 창문을 타고 감염체 하나가 기어들어 오기를 바랐다.
바라는 거라니.
꽤 오래 전부터 유아가 그에게 바라는 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고 동시에 그의 전부였다. 콴이 손쉽게 내어줄 수 있으며 그래서는 안 되는 것. 그리고 유아는 입 밖으로 그를 꺼내어 그에게 부담주지 않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에 많은 품을 들였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콴이 자신을 위해 웬만한 것은 다 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을 것이기에 특별 취급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던 탓이다. 그건 천유아의 특별함이 아니고 콴의 특수성이었다. 단순히 그게 자신이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뭐든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특수성.
그 특수성에 딱 한 번만 기대어 소중한 사람이 되는 건 감히 바라지도 않을 테니 나도 마주안아도 되냐고 물어 볼까, 그게 아니라면 아예 네 품은 내 것으로 남겨 달라고 할까. 제가 생각하기에 꽤 저열한 상상들이 머릿속에 폭주하듯 밀려들었으나 유아는 제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콴이 제가 좀 더 편히 기대도록 자세를 조정하는 동안에도 나 정도면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다 못해 최고일 텐데 네 손해도 아니니 연애 대상으로 날 한 번 고려해 보는 건 어떠냐는 당돌한 생각을 했다가, 그냥 제가 좋아한대도 최악은 아닐 거라고 확언해 달라고 엎드려 빌고 싶기도 했다. 그는 그마저도 그러마 했을 것이기에. 결론적으로 그가 떠올리는 모든 풋내기 같은 제안은 고지식한 이성에 막혀 폐기되었지만, 상상은 자유이지 않은가.
“건강하게만 자라도 된다는… 그런 건 아니죠?”
“… 내가 너한테 꼭 뭔가 바라야 해?”
유아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한참 대답이 없자 분위기를 풀기 위해 되도 않은 농담을 하던 콴도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천히 어깨 아닌 허리께를 끌어안은 그가 고심하더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유아는 나 때문에 부모님과 싸우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주기만 해서는 불공평하잖아요. 덧붙이는 말에 유아는 자신은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 불공평하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싶었다가,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천유아는 제 울타리 안에 다정하지는 못했으나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그 안에 있던 대상이 다정한 듯 무심한 부모뿐이었기에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만을 안 채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 속에 남몰래 콴의 이름을 집어넣고, 또 부모님과 그들이 만들어 왔던 세상에 대한 신뢰가 금 간 사이로 회의가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그간의 삶을 지탱하고 굴리던 열망이 붕괴하자 기준을 잃고 갈팡질팡하던 차였다. 그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은 콴이 천유아가 그어둔 최후의 방어선을 넘은 것에 대한 증표이자 방황의 산물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넌 그냥 내 긴 머리가 아쉬워서 항의하고 싶은 거지.”
“그건 아니지만… 길고 예뻤잖아요. 지금도 예쁘지만, 그 머리를 관리하면서 시간도 많이 들었을 텐데.”
손을 들어 유아의 짧아진 머리칼을 매만지던 콴이 볼멘소리에 중얼거리더니 손을 원위치시켰다. 허리를 감싼 체온에 또 한참 말이 없던 유아가 천천히 콴의 품에서 긴장을 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긴장을 풀려 애쓴다는 말처럼 모순적인 건 없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보여 그가 조용히 웃는다. 이상하게 좋은 향기가 나는 뒷머리에 제 이마를 고정하니 기분까지 말랑해진 느낌이었다.
허리 위에 둘러진 팔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린 후에 상대가 불쾌한 기색인지 아닌지 고개를 들어 살핀 유아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콴은 그런 그에게 설핏 미소지어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유아는 이유 없는 어리광을 단박에 수용 받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 입을 사리문다.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데.”
“유아가 바란다면 다…?”
“그럼…”
손끝으로 콴의 손등을 몇 번 건반을 연주하듯 꾹꾹 눌러대던 그가 불현듯 손에 힘을 뺀다. 천천히 큰 손등 위로 제 손을 덮은 유아가 뜸을 들였다. 유아가 행복할 수 있다면 정말 뭐든 들어줄 생각으로 질문을 던졌던 콴으로서는 언제나 당당하던 유아가 왜 이렇게까지 머뭇거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그가 요구하는 게 많아 간과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무언가 필요로 하는 모습을 좀체 본 적이 없었기에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싶어 토닥인다.
사실 쉘터 내에서의 천유아는 이름이면서 어떠한 것의 대명사였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인 너드들이 탐닉하던 소설 속 부와 권력, 명예와 더불어 지성과 미모까지 갖춘 성격 나쁜 퀸카 같은 것의 현신 정도로 통했던 것 같긴 하다. 자기가 철이 들었을 즈음에는 이미 정부가 붕괴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미합중국의 연방정부가 세계 경찰을 운운하던 시절에 그의 친조부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였고 부모님은 거기의 상원 의원들이었다고 했고 이런 세상 속에서 안전한 쉘터를 굴리고 있으니 지금도 막연히 대단한 사람이겠지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그에게 제가 줄 수 있는 게 딱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콴은 자신을 위해 늘 목소리를 내던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흉내를 내야만 하는 일이라도.
“… ‘난 괜찮아’라는 말, 하지 마.”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또 유아를 위한 게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 같아 콴이 품에 안은 사람을 쳐다본다. 정말요, 하고 물어보려는 찰나 제 머리 길이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라는 주문에 감히 대적할 수 없어서 그냥 순응하기로 한다.
정말 버틸 만 해서 괜찮다고 말했던 건데 그게 왜 싫은 건지 머리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구소에서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손목을 잡혀 끌려 나왔을 때 자기는 괜찮다고 했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째려보던 모습이 떠올라 콴이 입을 사리문다. 어차피 그거면 돼요? 하는 질문을 해 봤자 이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겠지. 콴은 그저 어깨에 고개를 마저 파묻고 상상 속의 유아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그렇게 할게.”
*
시간이 지나 콴의 숨소리가 정말로 고르게 변하고, 잠이 든 게 확실해지자 유아가 몸을 틀어 콴을 올려다본다. 이제는 조금 거리를 둘 수 있나 했더니 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제 마음을 헤집고 자기는 천연덕스레 잠든 모습이 원망스러웠다. 문득 내가 네게 뭘 바랄 줄 알고 내게 그렇게 굴었냐고, 내가 네 뭐라도 되고 싶어 하면 어떻게 했을 거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욕구가 울컥 솟았지만, 지나간 일로 저를 안은 채 잠든 그를 괴롭히고 싶진 않아 입을 다문다.
영원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의 사이로 상대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천유아가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이 정말 싫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