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w
2023. 02. 26.

Collapse
2023. 02. 26.
형사와 괴도의 다음 장

01
이안시샤
멸망할 세계
이안 메디치, 시샤 릴리안
리령, 이엘
‘세상이 멸망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건가요?’
한 번쯤은 들어보게 되는 그런 물음. 시샤의 대답은 괴도가 된 이후로부터 항상 같았다.
“그냥 있을 거예요~”
시샤 릴리안은 혼자라는 삶에 익숙했으니, 멸망이라 불리는 최후의 순간에도 혼자일 것이라 여겼다. 괴도의 삶이 시작된 후부터는 옆에 누군가가 있지 않았고, 만일 옆에 누군가가 있게 된다면 자신의 약점이 될 터이니 누군가가 옆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근무 탓에, 이안은 물 먹은 솜마냥 잔뜩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귀가했다.
“형사님~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이렇게 늦게까지 야근을 시키다니, 정말 악덕이에요!”
그리고 곧 시샤 릴리안을 마주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자, 동시에 시샤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평소와 같은 옷차림에 같은 표정. 다를 것 하나 없는 익숙한 사람이 이안을 반겼다. 식사는 다 챙기셨을까요? 형사님을 힘들게 만든 사람은 있었나요? 형사님 기다리는데, 너무 심심했던 거 있죠? 그래도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저랑 외출이나 할래요? 제가 맛있는 식당을 알아왔는데 형사님 취향이라고 장담하는데… 같이 가주실거죠? 앗 만약에 약속이 있다거나 하면 나중에 가도… 시샤는 이안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했고, 이안은 익숙하게 질문에 답을 해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과 시샤의 일상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 일상이 익숙해진지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어쩌다보니 옆집에 살게 되고, 어쩌다보니 같이 살게 되어, 지금의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었다. 시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귀가하는 이안을 반겼고, 이전까지 적막이 가득했던 공간에는 소란을 몰고 왔었다. 때때로는 이안이 시샤를 반길 때도 있었다. 조용하고 쓸쓸한 공간이 반겨주는 ‘혼자’인 삶에 익숙했던 두 사람이 서로가 반겨주고, 때로는 같이 귀가하는 ‘함께’의 삶에 익숙해졌다.
오늘도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시샤 릴리안에게도, 이안 메디치에게도. 시샤의 말만 아니었다면.
“아! 형사님 혹시 그 소리 들었어요? 세상이 멸망한대요!”
*
영원할 것 같았던 세상에 멸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이 드리워졌다. 멸망이라니. 사람들은 시답잖은 말이라며,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치부했지만, 그건 곧 사실이라고 밝혀졌다. 그 이후는 끝도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이 우호죽순 생겨났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감내할 수 없는 절망에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으며, 멸망이 신의 뜻이라며 선택받은 자만이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을 퍼트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멸망 속에서 사람들은 망가져갔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안과 시샤는 그쪽에 속하였다.
*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알에 시샤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이안은 그런 시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말했다.
“시샤, 발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이참, 대괴도는 튼튼해서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형사님도 신발 벗고 같이 걸어요~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을 걸어다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요! 그리고 모래가 발에 들어가면 불편하잖아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간질이고는 짭짤한 내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부드럽게 올려 치고 밀려나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가득했다. 수평선 너머로는 태양이 느릿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 태양이 완연히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는 순간 세상은 끝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이전이라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바닷가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 멸망이 세상에 도래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
어느덧 바다에 별이 내려앉았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바닷가는 고요한 만큼 별이 선명했다. 바다에 내려앉은 별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짠~ 돗자리 준비해왔어요!”
“아까 챙겨야한다고 다시 올라갔던 이유가 돗자리 때문이었나요?”
“그쵸! 모래사장에 그냥 앉으면 모래가 옷에 들어오잖아요~ 그건 따끔거려서 싫은 거 있죠! 저 잘 챙겨온 거 같죠? 칭찬해주세요~”
시샤는 돗자리를 펼치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앉으라며 돗자리를 탁탁 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잘 했습니다.”
이안은 시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일상이었다. 이렇게 마지막 날 굳이 바다에 찾아온 것도 바다에서 노을을 보고 싶다고 시샤가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밤은 점차 깊어가고, 쌀쌀한 냉기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이곳에는 생명의 소리라곤 서로의 심장소리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수놓아진 달과 별이 산란했다.
“있잖아요, 형사님. 괴도와 형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분명 다음권이 존재하겠죠?”
“응, 존재할 거야. 애초에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 숨 쉬며 존재했다는 것은 이 우주에 계속해서 남으니까요.”
“존재한다면 완결이 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평소에는 완결을 기다리지만... 이안과의 이야기는 끝이 안 나기를 바라요. 우주에서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요.”
시샤는 바랐다. 자신과 이안,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계속해서 이어져나가기를.
“있잖아요,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이안이라서 다행이에요.”
*
어느덧 새벽이 찾아왔다. 어둠을 걷어내고 수평선 위로 떠 오른 태양의 산란하는 빛이 세상을 밝혔다.
“시샤.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요.”
이안 메디치는 멸망을 앞두고 웃었다.
“그곳에서도 저를 잡아주세요, 이안.”
시샤 릴리안은 멸망을 앞두고 바랐다. 다시 찾아올 그날을. 그래서 누군가가 다시 자신에게 ‘세상이 멸망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건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이전까지의 대답과는 다른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전 이안이랑 함께할래요.’